2012년 5월 20일 주일 오후 예배를 마치고 남편은 공구를 몇 가지 챙겨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재촉한다. 김 권사님 댁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 점심시간에 김 권사님은 화장실 변기가 고장이 나서 큰 것, 작은 것을 싸고 나서 물을 떠 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그는 변기 고치는 일을 다음 날로 미룰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주일이다. 새벽부터 오후 5시까지 쉴 새 없이 하루 종일 힘들었으니까 오늘 오후는 좀 쉬고 내일 가자고 하여도 막무가내였다.
“나, 글을 써야 한다고요. 단편 공모에 응모할 날이 얼마 안 남아서 바쁘다고요.” “이 일이 그 일 보다 더 바쁜 일이야? 빨리 나와.”
숫제 명령이다. 하긴, 애초에 내가 명예퇴직을 했을 때에는 남편의 일에 무조건적으로 내조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 마음이 변질되면 안 되지, 라고 생각하면서 컴퓨터를 끄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남편을 따라 나섰다.
김 권사님은 3년 전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가 났다. 우리 부부는 그 때 곤혹스러웠었다. 동네 사람들이나 자녀들이 나이든 성도가 새벽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에 대하여 말이 많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자녀들은 믿음이 좋은 늙은 어머니가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는 일에 대하여 늘 불만을 품었다. 그렇게까지 할 것이 뭐냐는 것이었다. 몸도 늙고 다리도 불편한데 좀 적당히 하시지 그러냐고 성화였다. 그러나 권사님의 신앙은 새벽기도는 반드시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수준이었다.
그 분은 젊어서부터 남편이 경제 능력이 별로 없어서 아들 넷, 딸 둘을 혼자 힘으로 가르치느라고 도시로 나가서 식당일을 하였다. 식당일로 바쁜 와중에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여 도시 교회에서 권사 직분을 받았다. 자식들이 다 자라서 결혼을 하여 독립을 하게 되자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몸에 병을 듬뿍 지고 내려왔다. 몇 걸음을 걷기도 힘이 들었다. 연세는 이제 70대 초인데 허리와 무릎이 망가져 잘 쓰지 못했다.
그런 몸으로도 새벽기도를 하러 오고 싶어서 전동차를 샀다. 몇 년 동안 전동차를 타고 시장에도 가고 새벽에 교회에도 왔다. 시골에서 전동차를 타고 다니는 대부분의 노인들은 길 무서운 줄을 모른다. 마치 승용차처럼 길 한가운데로 막 몰고 다닌다. 이것도 분명히 ‘차’라고 하면서. 길에서 전동차를 타고 다니는 분들을 만나면 아슬아슬하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하다고 큰소리 탕탕 친다.
김 권사님도 그랬다. 목사님은 길 한쪽으로 오고 가는 차를 잘 살피면서 방어 운전을 해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것도 운전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좀 덜렁대는 편인 김 권사님에게 목사님은 늘 조심하라고 경고하셨다. 그럴 때마다 그분은 괜찮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몇 년 전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사택에 들어왔을 때 전화가 왔다. 교회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사는 우리 교회 성도였다. 꽝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교통사고가 났더라는 것이었다. 전동차를 타고 가던 김 권사님은 넘어져 길바닥에 뒹굴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전동차는 찌그러져 못쓰게 되었다. 성경책과 찬송가책도 가방에서 쏟아져 길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날은 안개가 짙었다. 한 치 앞도 잘 안보일 정도로 안개 덫이 쳐있었다.
안개가 짙어 앞이 안 보이니 권사님은 전동차가 논에 빠질까봐 자기도 모르게 길 가운데 쪽으로 당겨서 갔다고 한다. 운전에 서툰 자들이 중앙선을 물리며 운전하는 일이 흔히 발생하는 것처럼. 그 때가 가을이었던가 싶다. 6시경에도 캄캄했고 게다가 안개까지 끼어 더욱 더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승용차처럼 오른쪽 길 다 차지하고 가고 있을 때 그 시간에 하필이면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오고 있었다.
맞은 편 차에서 뿜어 나오는 불빛에 시야가 더 가려진 권사님은 길이 분간이 잘 안 되어 더 중앙선 쪽으로 다가갔던 모양이었다. 새벽에는 차들이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 때 차 한 대가 어느새 나타나 앞 차를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넘어 들어왔는데 안개 때문에 미처 전동차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목사님이 길에 나갔을 때에는 어느새 119 차가 와서 환자는 병원으로 후송된 후였다. 환자가 의식을 잃었으니 사고가 크다고 생각되어 급히 옮겨갔던 것이었다. 목사님은 걱정스런 마음으로 길에 흩어져 있는 책들만 가방에 주워 담아 왔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가 되었을 때 큰 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북대 병원에 입원했고, 다행히도 다른 데는 부상이 없고 무릎 뼈가 부서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동차에 정면으로 치었으니 머리가 크게 다쳤으면 큰일이다 싶어 염려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사 권사님을 받아주셨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무릎 뼈를 전에 몇 번 수술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큰 수술이 될 것이어서 긴 수술 후에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자녀들이 각서를 쓰고 수술에 들어갈 예정인데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다.
목사님은 다른 일은 젖혀두고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 성도들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전도의 문이 막히곤 한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잘 되고 잘 살면 부러워하면서 나도 교회를 다녀볼까 하는 마음을 먹지만, 교회 잘 다니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질병으로 고생을 하며 살면 뒤에서 수군거린다. ‘믿으면 뭐하나, 저렇게 맨 날 빌빌거리면서’라고 말하며 교회 다니는 일을 회피하곤 한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이 있으므로 영혼이 잘됨같이 육체의 일도 잘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술이 잘 되었다. 몇 달 동안 전북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외과 치료는 마쳤는데 못쓰던 무릎을 또 수술을 한 탓으로 이제는 무릎이 전혀 구부러지지 않았다. 충남 G읍에 있는 재활병원에서 2년 넘게 치료를 받았다. 통합 3년여 간 병원생활을 했다. 자식들은 무릎을 못 쓰니 그 병원에서 평생을 보내야 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권사님은 본 교회에 다니고 싶어 애가 탔다. 자녀들이 허락을 안 하니 병원 관계자들도 환자가 병원 밖으로 못나가게 했다.
2012년 5월 1일은 노동절 날이라 병원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았다. 권사님은 말 잘 듣는 아들에게 몰래 전화를 하여 그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와버렸다. 다음 날 아들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딸들이 난리가 났다. 그들은 어머니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몸으로 시골집에 가서 살다가 변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노발대발 하면서 전화에 대고 앙앙불락하였다.
또 자기네들이 멀어서 자주 찾아갈 수 없는 마당에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이나 목사님에게 끼칠 피해가 막중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이하랴, 내 집이 가장 편하고 좋은 걸.
5월 1일부터 지금까지 목사님은 그분이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설을 해주었다. 시골집은 문턱이 높은 편이다. 출입문 밖에 경사로를 만들어주었다. 그 동네 사는 어느 성도가 말했다. “목사님이 없으면 권사님이 못살겠네. 날이면 날마다 오셔서 권사님 편하게 살라고 시설을 해주니.”그런데 오늘은 변기가 고장이 났다는 것이었다. 몸도 불편한데 변기가 고장 나면 안 되지. 그 몸으로 물을 떠 부으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고 당장 가자고 성화를 댔다.
막 가려고 하는데 또 어디선가 전화가 왔다. 부지런한 박 집사님이었다. 주일 하루는 예배 후에 푹 쉬어야 한다고 말해도 막무가내로 예배가 끝나자마자 밭으로 가는 분이다. 시골 사람들은 농번기가 되면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에 매달려 살아간다. 대부분이 자작농이니 얼마 안 되는 밭뙈기, 논뙈기나마 손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찌어찌해서 땅이 1000평쯤 있는데 300평 정도는 나무를 심었다. 나머지 땅을 놀릴 수가 없어 뭔가를 심으려하니 엄청 바쁘다. 진짜 농부가 아닌지라 철을 분별하지 못하므로 성도들의 얘기를 듣고 철에 맞춰 여러 가지 씨앗을 심었다.
일단, 반찬으로 먹을 오이, 가지, 호박 몇 포기를 심었다. 과일값이 비싸므로 사먹을 수가 없어서 토마토, 수박, 참외 몇 포기도 심었다. 옥수수와 고구마는 기본적으로 해마다 심는 것이다. 올해에는 땅콩도 심었다. 이런 것들은 반찬과 간식으로 먹을 것들이다. 그래서 시골에 살면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반찬값과 과일값을 절약할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친구는 식료품값이 폭등하여 엥겔지수가 매우 높아졌다고 전화에 대고 불평을 쏟아낸다.
나머지 땅에는 검은 콩, 노란 콩, 팥을 심을 예정이다. 올해에는 고구마를 좀 일찍 심었다. 많이 심었으므로 우리 식구와 성도들이 다 먹지 못할 것이다. 나머지는 팔 예정이다. 어떻게? 길가에 쌓아놓고 모정에 앉아서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팔려고 한다. 사모가? 글쎄, 사모는 장사를 하면 안 될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고구마 순 값과 농사비용을 빼내야 하니 어떡하겠는가? 올해에는 고구마 순 값이 매우 비쌌다. 순 하나에 처음에는 70원하다가 좀 지나서는 60원 했다. 거기에 묵은 땅을 트랙터로 갈아야지, 비료도 뿌려야지, 날이 가물어 물 뿌리는 스프링쿨러를 사다 설치했다.
우리 부부가 날마다 땡볕에 나가 일한 것은 값으로 따질 계제가 못된다. 고구마 순을 심고 나서 밤새 끙끙 앓으니 목사님은 가소롭다고 웃었다. 작년에는 심는 철을 못 맞춰서 수확이 안 좋았다. 올해는 제대로 때를 맞췄으니 기대가 된다.
어쨌든, 시간만 나면 밭에 엎드려 일하는 올해 79세 되신 박 집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로? 그분도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허리와 무릎이 아파 잘 걸을 수가 없다. 전동차를 타고 밭에 왔단다. 일을 하다가 무슨 일로 전동차를 돌려세워 놓으려고 했더니 전동차가 멈추어 버렸노라고 했다. 권사님 댁에 가기 전에 먼저 집사님 밭에 들렀다. 다행히도 밭이 가는 길에 있었다. 공구를 하나 들고 전동차 쪽으로 가는 그의 뒤에 대고 내가 말했다.
“당신이 119 목사입니까? 전동차가 갑자기 선 것을 당신이 어떻게 고치느냐고. 애프터서비스를 부르던지 해야지, 내 참.” 몇 분이 못 되어 남편이 싱겁게 웃으며 돌아왔다.“왜? 왜 금방 오셔요?”“전동차 밑에 흙이 한 무더기 있어서 그게 걸려서 앞으로 안 나갔더라니까. 내가 금방 고쳐버렸지.”
시골 노인네들은 여름에 비가 오는 날 보일러를 틀고 싶은데 보일러가 고장이 났다고 전화하여 가보면 온도를 겨울처럼 낮춰 놓고 보일러를 틀고는 고장 났나 보다고 목사님을 부르곤 하신다. 보일러는 방안의 온도보다 더 높게 온도를 설정해야 돌아가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모르면 답답한 게 시골 사람들의 살림살이이다.
한 가지 일을 가볍게 마치고 권사님 댁으로 가서 변기의 부속을 갈아주었다. 3년 동안 사용을 안 하다가 며칠 사용하니 낡은 부속이 고장이 났던 것이다. 물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을 본 권사님은 좋아서 입이 헤벌어진다. 집 안에서도 보조 기구를 끌고 다니며 주방으로, 침실로, 화장실로 잘도 돌아다니신다.
“집에 오니 병원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당연하죠. 아무렴, 병원에 사는 삶이 어디 사람 사는 삶 이었겠어요? 불편하긴 해도 집에 오니 이젠 살 것 같아요. 목사님이 저 때문에 많이 수고로우셔서 그게 부담이 되어서 그렇지, 다른 것은 모두 집이 더 좋지요.” “목사는 자기 양들 보살피라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 아닙니까? 당연히 제가 할 일이죠. 부담 갖지 마시고 불편할 때마다 전화 주세요. 언제든지 달려올게요.”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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