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광해군 [생애 1575년- 1641년, 재위 1608년- 1623년]은 1623년 3월 14일 새벽 황해도 평산 부사 이 귀와 경기도 장단 부사 이 서가 몰고 온 군사에게 어이없이 기습당해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왕위에서 제거되었다.
인조반정에 대해서 광해군의 대동법 강행이니 궁궐중수니 하는 여러 실책이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광해군이 실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왕위에 오르도록 큰 역할을 했던 이 이첨, 유 희분을 필두로 한 대북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다른 정파는 일체 용납도 안 했을뿐더러 철저히 탄압해서 타 정파의 원한을 극대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이첨은 유능했었는지는 몰라도 극히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 정권을 잡자마자 광해군의 등극을 반대하던 전 영의정 유 영경부터 잡아 죽였다. 이 때부터 살기가 이 이첨의 대북파 언저리에 돌기 시작했다. 광해군의 큰 실정인 영창대군의 모살이라던가 친형 임해군의 賜死라던가 ,인목대비의 궁궐 밖 추방 등은 물론이고 여러 번의 옥사를 일으켜 타 정파를 제거했다.
광해군이 형 임해군과 동생 영창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제거함에 앞장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의외로 소심한 성격을 가졌었다. 이 이첨 일당이 위의 강경책을 밀어 붙일 때도 그는 끝까지 우유부단하게 주저했었다. 아무리 보아도 지나친 이 이첨 주도의 대북파 독주는 중종 때 조 광조등의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이 훈구파의 교활한 반격을 가져오게 했다는 판단 때문인 것이 추측이다.
대북파의 독주는 결국 광해군에게 이이첨과 대북파들에게 권태감를 가져오게 했다. 전횡을 일삼는 이이첨에게 염증을 느낀 광해군은 이이첨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박승종에게 영의정 직을 넘겨주고 이이첨을 견제했다. 소북파 거두 박승종은 원만해서 이이첨과 같은 강경책을 배격하고 광해군의 뜻을 따라 여러 당파를 서서히 기용해 나갔다,
쿠데타 군에게 쫓겨서 창망히 궁에서 도망친 광해군은 반군의 주모자가 이이첨이 아니냐고 물었다 한다. 그 무렵 그가 이 이첨에게 가졌던 혐오감이 표시되는 일화다. 쿠데타 없이 세월이 그대로 흘렀다면 이이첨은 아마 광해군에 의해서 점차 실각 되었을지도 모른다.
변방의 외직이지만 몇몇 서인들이 광해군 왕조에 발을 들여 놓기 시작했다. 그냥 세월이 흘러갔으면 서인들도 서서히 급을 높여 가며 이이첨의 대북파를 견제할 세력으로 성장하지 않았겠나 하는 예상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겨우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 서인 무리중에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있었다. 이 귀, 김 류, 이 서 등 권력의 언저리에 겨우 발을 들여놓은 서인들은 그 쥐꼬리 같은 힘이라도 십분 활용하여 광해군을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하자는 음모를 꾸몄다. 군사를 일으킨 평산 부사 이귀는 평산에 부임한 이래 호랑이를 잡는다는 이유로 자주 군사를 동원해서 훈련을 했다,
천안 박물관에 전시된 이귀의 초상화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턱이 뾰족하여 성질이 매우 급했다고 전해온다. 그는 부인이 죽은 상중에도 모반을 도모하러 부지런히 바깥 나들이를 했다고 한다. 그는 이웃인 장단 부사 이서와 함께 드디어 반란의 횃불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내쫓고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인조이다,
이 귀가 반군 조직을 위해서 이사람 저사람 포섭하는 사이 모반의 소문이 짜하고 퍼졌다. 구체적으로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을 모신다는 정보까지도 보고 되었다. 정원군은 선조의 잘못 된 자식 농사로 생겨난 임해군과 순화군 등과 함께 세간에 악평과 원성이 자자했던 불량 왕자 3인방의 한 명이었다. 그들은 살인과 폭행을 일삼고 남의 재산 탈취를 예사로 해댔다. 그러나 정원군에 대한 기록은 아들 인조 때에 쓰여 진 것으로 미사여구 일색이다.
지금처럼 정권 교체의 선거가 있던 때도 아니어서 확실하게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은 모반이나 무고에 의할 수 밖에 없었다. 정조 치세 24년간 모반의 무고가 24년간 105건이나 접수되었었다. 그러나 광해군 재위 15년간 무려 443건의 역모 고발이 있었다. 절대 권력을 잡은 대북파가 정적을 처치하기 위해서 해댔고 또 대북파를 타도하기 위해서 반대파가 해댔던 모반의 무고가 극성을 떤 것도 광해군 왕조의 특징이다 .이렇게 모반의 밀고가 많았으니 나중에는 광해군이나 집권 대북파가 모반 보고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 귀가 왕으로 모시려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같이 범용한 인물과 소문의 캄비네이션은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정보의 신뢰성을 두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능양군은 동생 능창군을 유배 보내고 죽인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깊어서 음모 초기부터 가담했다. 광해군측에서 그의 정치적 야망을 너무 과소평가 하였다고 하겠다. 루머가 무성해졌지만 이 귀는 음모를 추진하면서도 대담하게 한 수 더 떠서 '나는 억울합니다' 라는 역 상소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1623년 3월 무시할 수 없는 모반의 정확한 정보가 입수되었다. 3월 13일 밤 광해군은 박승종, 임연, 윤휘 등과 어전회의를 열고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하고 다음 날 금부도사를 황해도 평산의 이귀에게 보내 체포 압송하기로 결정하고 그 날의 회의를 끝냈다.
그러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된 낌새를 이귀가 먼저 알아채고 선수를 쳤다, 이귀와 장단 부사 이서가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임지에서 각각 끌고 온 1,000명의 군사가 이 어전 회의가 있던 시각에 이미 한양 근교 연서역(지금의 예일여고 자리)에 집결해서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정원군 시절부터 소유하고 있던 능양군의 별장이 있었다. 연서역 부근 능양군 인조의 별장이 있던 곳에 세운 비각은 .숙종 때 세운 비각이다. 능양군과 반정의 핵심 인물 최명길을 비롯한 여러 명이 이귀를 이곳에서 맞았다.
밤이 늦어 움직인 병력은 뒤 늦게 홍제원에서 합류한 이서의 부대와 함께 도성안으로 진격했다. 그날 자정 한양 북방 창의문을 통과해서 밀려 들어온 반정군의 1,000명 병력이 한양 창덕궁에 쇄도하여 미리 내통하고 있던 궁궐 호위대장 이호립이 열어주는 궁궐문으로 몰려 들어가서 정권을 탈취했다.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밀려오자 광해군은 내시의 등에 업혀 창덕궁 북쪽 담을 넘어 탈출했다.
야밤에 궁을 나선 광해군은 창졸간에 호위 내시의 등에 업혀 사복시 개천 부근 (지금의 종로 구청과 한국일보 사이) 의 안 국선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며칠 뒤 광해군은 안 국선의 고발로 궁으로 끌려 와서 독이 파랗게 오른 영창 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가 퍼붓는 갖은 모욕과 저주를 당했다.
反政軍은 廢母殺弟라는 광해군의 패륜적 결함 문제를 반정의 명분으로 삼았기에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폐위 당한 광해군과 왕비,그의 아들 왕세자 부부는 강화도로 유배하였다. 1622년 5월 위리안치[圍籬安置]된 폐세자는 외부인들과 연계해서 탈출을 기획하고 다리미와 큰 가위를 이용해서 울타리 밑에 땅굴을 파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었다.
보고를 받은 인조는 한달 뒤 사촌 동생인 폐세자에게 자진(自盡)을 명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어명을 내려 폐세자는 목을 매고 자살했다. 폐세자 빈의 운명 역시 가혹했다. 그녀는 폐세자가 탈출할 때 나무에 올라가 집밖의 동정을 살폈는데 집 밖으로 나간 폐세자가 몇 걸음 못가서 체포되는 장면을 보자 충격을 받고 기절을 했다. 그 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워 있다가 사흘 뒤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광해군의 아내 폐비는 얼마 못살고 다음 해 1623년 10월 세상을 하직하였다. 아내와 자식 내외를 잃은 광해군에게는 출가외인 일 수밖에 없는 딸을 빼놓고는 혈혈단신의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광해군은 15년간의 재위기간보다 더 긴 19년간의 유배 세월을 그렇게 굴욕 속에서 살다가 쓸쓸히 죽었다.
실책과 함께 치적도 많았던 그를 反明 親淸과 廢母殺弟라는 명분으로 내쫓은 인조와 그의 일당인 西人 그룹들은 병자호란의 대참화를 자초하므로써,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느 일대의 실책을 범하고 만다.
광해군은 몰락했지만 그래도 그가 암군(暗君)이 아니었던 탓에 세력 기반은 조금은 있었던듯하다. 폐위 된 뒤에 제주에서 죽은 왕비에게 큰 오빠되는 유희견은 조카 유효립 등과 함께 모반을 꾀하여 성공하면 광해군을 복위 시켰다가 다시 그 왕위를 왕족인 인성군에게 물려주고 광해는 상왕이 되는 계획을 세웠으나 도중에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 갔다.
광해군이 유배된지 5년쯤 지나서 또 다른 모반이 있었고, 그 모반도 발각이 나서 금부도사가 반란 음모 조직과 내통한 광해군을 모시는 나인궁녀들을 잡으러 오자 광해군은 문을 막아서며 슬피 울었다. 체포 대상이었던 애영[愛英]이라는 나인은 칼로 목을 찌르고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뒤 광해군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철저한 자폐의 처세에 돌입한듯하다. 이 말인즉 그저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말을 하지 않고 식물인간 처럼 지냈다는 말이다.
광해군이 몰락후 굴욕과 고통의 유배 생활에서 탈출할 기회는 딱 한번 있었다. 인조의 친명 반청책에 불만을 가진 청나라의 태종이 대군을 몰고 조선을 침공 했을 때였다. 그의 몰락을 가져온 친청책을 취해왔던 광해군이 어떻게 해서라도 친히 출병한 청의 태종에게 연락을 넣어 구원을 요청했더라면 그 고통스런 유배생활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실각 10여 년 동안 광해군은 주변인의 철저한 숙청과 감시로 그런 헌신적인 일을 해줄 존재마저 소멸되어 버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를 끝까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아홉살의 나이에 광해에 의해 죽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였다. 어린 나이에 늙은 선조에게 시집을 와서 얻은 아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지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였을 뿐만 아니라, 대비의 친정아버지 김제남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그에 더하여 대비인 자신을 강등시켜서 궁중 밖으로 내 쫓아서 피눈물의 세월을 보내게 했으니 원한이 사무칠 수 밖에..........,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충천한 인목대비는 인조 이하 반정세력에 광해군을 죽이도록 무섭게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폐위시킨 명분이 광해군의 혈족 살해인 폐모살제 였는데 인조의 숙부인 광해군을 죽이면 반정의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에 집권세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지만, 일부 세력들에 의해 암살이 기도 되기도 했었다.
병자호란속에 교동도로 이감(移監)된 광해군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 피해의식이 충만했던 인조에게 다시 먼 제주도로 이배(移配)당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637년(인조 15년) 5월이었다. 그 먼 원도(遠島)에서 다시 한양으로 돌아 올 길을 전혀 없었다. 광해군은 자기가 죽을 자리로 보내 진 것이다.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15년 이상의 세월을 보낸 뒤에 남은 여생을 보낼 광해군을 실은 이송선은 교동도의 포구에서 제주로 떠났다. 중사(中使)·별장(別將)·내관(內官)·도사(都事)· 대전별감(大殿別監)나인,서리,나장(羅將)들도 승선해서 광해군을 감시 호송했다,
광해군에게 어디로 간다는 행선지를 알려 주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의 선실을 장막으로 다 가려서 밖을 내다 볼 수도 없도록 했다
인조는 쌀쌀한 바다 날씨에 먼 곳을 가는 광해군에게 솜옷 한 벌을 보내주어 약간의 성의 표시를 했다. 째째해 보이는 성의 표시였지만 광해군은 적어도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운명으로 보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한 가닥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1637년 6월 6일. 광해군의 유배선은 제주 어등포(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다. 포구에서 하루를 보낸 광해는 제주로 들어와 처소에 안치되었다.
광해군을 교동에서 제주까지 압송해온 호송 수행원 조직의 규모가 상당했던 규모로 보아 광해군이 중요 감시 대상인의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유배 생활이라지만 거의 형무소와 같은 유폐 생활이었다. 광해군은 집밖으로의 외출은 물론 방 밖으로의 외출도 제한을 받았다
광해군이 최후를 마친 이 집에 대한 기술은 조선인이 아니라 외국인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유명한 하멜 표류기의 저자 하멜은 1653년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자카르타를 떠나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하였다. 선원 63 명중에 단지 36명만이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孝宗에 의해 출국을 금지 당하고 억지 타국 생활을 하게 된다. 13년 뒤 하멜을 포함해서 8명이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했는데 광해군이 쓸쓸히 죽은 때는 하멜이 표류해오기 12년 전이다,
하멜이 표류했을 때 인조도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인 효종[5년]이 재위에 있을 때였다. 그때 제주 목사는 이원진이었는데 표류 선원들에게 인도적인 처우를 해주었다. 하멜 일행은 큰 집에 수용되었는데 하멜은 수용된 집의 규모와 시설을 보고 조선이 자기들을 나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이 집이 왕의 숙부가 유배와서 머물러 있었던 장소라고 하멜표류기에 썼다,
그 때가 인조의 아들 효종 5년 때니까 이 말은 조금 맞지가 않는 말이다. 광해군은 인조의 숙부였으니까 효종에게는 종조부였던 셈이다,
제주시 유배 적소터 = 제주에서 민간 시설로 이런 대형 건물은 찾기가 힘들다. 제주 관아의 일부였거나 관의 손님 들이 머무는 역관 같은 곳에서 광해군의 말년을 보내지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드물게 기록된 일화를 보면 광해군은 주변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자주 당했던듯 하다.
이괄의 난 때 한양으로 몰려온 이 괄의 군대를 피해 인조는 공주로 도주하고 광해군은 일시 충청도 태안으로 피신한 일이 있었다. 연려 실기술에 의하면 그를 압송해서 태안으로 호송한 나졸들은 자기들은 안방에서 자고 광해군은 작은 방에서 재우는 수모를 주었다. 제주도에서도 광해군의 쓰라린 생활은 계속되었다. 제주도에서도 광해군이 당했던 수모의 한 조각이 기록에 남아있다. 유배소의 계집종이 왕년의 상감이었던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위는 역사가 남겨준 사례로서 사회 최하류 계층의 인간들이 광해를 이렇게 함부로 불렀으니 평소 광해군이 당한 수모의 수준에 이해가 간다. 기록은 광해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아무말도 하지않고 꿋꿋이 참았다고 했다. 제주 목사들이 광해군을 내놓고 학대했다는 말은 없다. 광해군 말년에 제주 목사 이 시방이 광해군을 각별하게 모셨다고 특기하고 있는데 말년에 노쇠해진 광해군에게 대한 인간적인 연민의 정이 일어났기 때문인듯하다,
이 시방은 반정군에 말석으로 참가했던 반정인사였다. 광해군에 대한 반정 패거리중에 유일하게 베푼 마지막 인정이었던 것이 광해군에게는 다행이다.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에 67세로 눈을 감았다. 그의 임종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죽기전에 어렸을 때 헤어진 엄마 공빈 김씨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공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고 광해군이 아직 어렸을 때인 25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제주 목사 이 시방이 광해군의 부음을 듣고 달려 가보니 계집종이 이미 싸늘하게 식은 광해군의 시신을 염을 하고 있었다.
시신이 상할 것을 염려한 이 시방은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지시가 있기전 즉시 상복을 입고 상을 치뤘다.
인조는 예조 참의를 보내서 예를 표하고 그 해 9월 그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해서 매장했다. 그리고 광해의 생존했던 딸에게 물질적인 특전을 베풀고 광해군의 외손들이 묘를 돌보도록 하였다.그것이 그가 광해군에게 표했던 마지막이자 최대의 호의였다.
인조는 병자호란 때 용골대와 마부대가 별동대를 몰고 내려오면서 바람처럼 통과했던 파주 탄현의 장릉(長陵)에 모셔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도 김포의 장릉(章陵)이라는 왕의 능에 안치되어 있다. 정원군은 불량배로 일생을 지냈어도 왕이 된 아들 덕분에 임금의 묘소에 붙는 능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능답게 묘역도 넓고 호화스럽다 , 김포는 청군이 처들어 왔다는 경악스러운 정보에 수만의 백성들이 강화도로 달려갔던 길목이다. 강화도 방어 사령관인 김경징이 식량 때문에 입도를 허락지 않아 해협 주변에 몰려 있던 수만의 난민들은 추격해온 청군에게 도륙당하고 능욕당하고 납치되었다. 인조와 그 아버지의 호화로운 두 묘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엮은 역사의 길목에 자리 잡은 것은 역사의 한 아이러니이다,
광해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다, 인욕의 세월을 참고 버티다가 저세상으로 간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자 일찌감치 세상을 떴던 부인과 같이 합장되어 있어 묘는 쌍분이다. 인조 부자의 능과 달리 광해군의 묘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초라하고 작은 것은 물론 접근조차도 힘들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의 무리들에게 철저히 매도당하고 격하 당했다. 대조되는 묘의 위상은 인조반정의 무리들에게 매몰차게 수모당하고 격하당한 그의 위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악화 될 대로 악화 된 그의 이미지는 너무 나빠서 노산군이 복위되어 단종으로 추증 되었는데도 그는 광기를 부리다가 타도 된 폭군 연산군과 같이 동급의 인물로 평가되어 조선 왕조 내내 그를 추증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었다 . 지금으로 봐서 참 답답한 일이지만 반정의 일당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광해군이 야만족인 여진족의 후금과 가깝게 지내고 상국인 명에 등을 돌렸다는 것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그가 폐모살제의 패악을 저지른 군주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업적도 쌓았다. 임진왜란 이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또 다른 전쟁에 내몰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그의 평화추구의 이상과 수준 높은 외교의 노력만은 재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져 있었고 조선은 임진,정유왜란 으로 잿더미 된 생활의 기반을 복구하기에도 벅찬 실정이었으므로 강대한 세력을 가진 후금에 대하여 외교력을 펼치려 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왕세자 때부터 왜적의 침범으로 죄 없는 백성이 겪어야 할 참혹한 불행을 수없이 본 사람이었다. 영명했던 그는 전쟁의 참화를 누구보다도 몸부림 칠정도로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북방 누루하치의 철기병은 막강한 전투력으로 명나라를 파죽지세로 쳐내려 갔고, 멀지 않은 미래에 조선을 넘볼 것이라는 것을 예견 하였다. 그리하여 북방에 정보력을 집중하는 한편, 후금을 인정하는 실리적인 외교를 폈다,
이에 대해 사대주의 사상에 깊이 빠진 조선의 선비들은 문명국 명나라를 지우고 불과 몇년 전까지 사람으로 보지 않았던 야만인을 가까이 하려는 왕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기회를 노리다가 종국에는 인조반정이라는 쿠테타로 광해군을 내 쫓은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광해군 재위시 후금에 협력하는 척 하면서도 그들의 침공에 대비하여 조총부대를 양성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후금과의 대리전쟁에 파병하게 되는데, 이때 도원수 강홍립에게 후금과 힘껏 맞서 싸우지 말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항복하여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군졸들이 없도록 재량껏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는 집권과 함께 후금에 대한 관계를 단절함은 물론 전왕이 애써 구축한 북방 정보망을 폐쇄하고 망해가는 명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627년 후금 3만의 병력이 평안도 북부를 휩쓴 정묘호란이 있었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도주해서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는다는 맹약을 했다.
그런 굴욕적인 침범을 당하고도 시간이 지나자 눈치를 봐가며 공공연한 反 後金 정책을 들어냈다가 9년 뒤인 1936년 후금에서 청나라로 국호를 바꾼 청 태종이 지휘하는 병자호란으로 국토가 유린 되고, 수 많은 조선인들이 청나라로 납치되어 가는 참혹한 대패배를 당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형제국에서 신하국으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신하국으로 전락한 절차를 보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조건 없이 항복한 인조는 삼전도로 내려와 단을 쌓고, 그위 보좌에 앉은 청태종 앞에서 인조는 무릎을 꿇고 9번 절하면서 신하가 될 것을 맹약한 후, 맹약 내용을 비석에 새겨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삼전도 비 이고 5백년 조선 역사상 최대의 굴욕을 겪은 사건이다.
광해군은 인조 집권 이후 화를 자초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창을 통해서 보면 재평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광해군은 전란의 시기에는 군주가 추구해야할 가치를 정확한 정보 판단과 외교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체험을 임진왜란을 통해 알게 되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곳곳에 나타나지만, 반정을 통해 권력을 잡은 자들에 의해 기록된 역사는 이를 철저히 외면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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