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베드로전서 3장 15절)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쓴 책으로 <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는 책이 있다. 내가 애독하는 책 중에 한 권이다. 인도에는 70만에 이르는 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이 인도의 희망이요, 세계의 희망이라고 간디는 주장한다. 간디는 생각하기를 '도시화 되고 기계화에 대량생산화 되는 것이 좋은 것만이 아니다. 그런 방향으로만 세계가 나가다가는 결국 재앙에 이르게 된다'는 생각이다.
현대 문명의 병든 모습을 보면 간디의 말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간디는 도시화, 기계화의 대안으로 자치하고 자립하며, 독립성과 민주주의적 합의 제도를 갖춘 마을이 그 대안임을 주장한다.
1830년대에 인도 총독으로 있었던 찰스 메트칼프(Baron Metcalfe)가 인도의 마을공동체를 다음같이 묘사하였다.
"마을공동체는 거의 자족적이고 외부에 대해 거의 독립적인 작은 공화국이다. 그들은 다른 어떤 것도 존속하지 못하는 곳에서 존속한다. 각각이 분리된 작은 국가인 이 마을공동체들의 연맹은 그들의 행복과, 자유와, 독립의 상당 부분을 누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간디,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11페이지)
나는 어린 시절 경북 청송의 두메산골인 사부실 마을에서 자랐다. 그 시절 마을에 청년실업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온 마을이 남녀노소 모두가 자기 일을 가졌고 자기 역할이 있었다. 그리고 장애자가 있으면 온 마을이 그를 돌보았다. 마을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도 없었고 고혈압이나 당뇨병 약을 먹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이 자치로 다스려졌고 자립하는 마을이었다.
간디가 쓴 <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 >는 책을 읽으며 내가 어린 시절 자랐던 마을이 인도의 마을과 흡사함을 느꼈다.
나는 4년 전 70세에 목사직을 은퇴하면서 고향마을에 가서 노후를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고향마을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고향 떠난 수십년 만인 고향은 너무나 변하여 있었다. 너무나 황폐한 마을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래서 남은 생을 고향마을로 들어가 어린 시절의 그 정다웠던 마을로 복원하는 일에 남은 삶을 걸어볼까를 주저했다. 그러나 여의치 못하여 고향마을로 들어가지를 아니하고 동두천 쇠목골 마을로 들어 왔다.
쇠목골 마을로 들어와 이 마을을 노인들과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씩씩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로 가꾸어 나가는 일에 자신을 투자하기로 다짐케 되었다. 이 시대에, 이 땅에서 교회가 하여야 할 일이 많지만 마을다운 마을, 주민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마을을 세우는 일 또한 보람 있는 일이요, 넓은 의미에서 선교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제 4년이 지나 준비가 되었기에 동두천 쇠목골 마을을 멋있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문화마을로 가꾸는 비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준비한 것이 60여 세대가 들어설 수 있는 집터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60세대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자치로 꾸려 나가는 마을을 세우되, 모두가 자기 일을 가지는 완전고용의 마을을 이루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복지마을을 이루는 꿈을 꾸게 되었다.
먼저 재단법인 두레문화마을을 설립하여 마을을 세워 나가는 울타리로 삼고 숲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문화마을을 세우기로 하였다. 마을을 세우는 성경적인 기준을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말씀에서 찾았다.
마을이 희망이다.(2)
우리 조상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을 이루고 마을에 몸담고 살아왔다. 나라가 있기 전에 마을이 있었고, 겨레가 있기 전에 마을이 먼저 있었다. 조상님들은 마을 공동체를 일컬어 < 두레 >라 하였다. 그래서 두레박이라는 말이 마을공동체 두레에서 함께 쓰던 바가지를 일컫는 말이었고, 마을 공동체의 경계선에서 원둘레란 말도 나왔다. 그런데 마을공동체인 두레가 무너져 가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해지기 시작하였고, 서로가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가 되어졌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일들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가 공동체의 회복 곧 마을의 회복이다. 최근 들어 마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져 마을의 재발견, 마을의 복원, 마을 살리기 등의 말이 관민 간에 높아지고 있는 점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제대로 된 마을이 이루어지려면 5가지 목표를 세우고 시작하여야 한다.
첫째, 항상 배우고 토론하며, 학습능력을 키워 나가는 평생학습의 마을이 되어야 한다.
둘째, 마을의 문제를 주민 스스로 해결하는 주민 자치마을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 안정적인 경제생활이 가능한 경제 자립의 마을이 되어야 한다.
넷째, 마을 인심이 훈훈하여 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이 살아 있는 마을이어야 한다.
다섯째, 올바른 가치관과 열린 정신세계가 높임 받는 문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에 바람직한 마을을 만들어 나가려면, 세심하고도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전략을 바탕으로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에 < 마을 만들기 >는 성공할 수 있다. 두레선교운동은 40여 년 전인 1970년대부터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힘써 왔다. 그래서 < 두레 >란 말을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을 때에 두레가족들이 두레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두레>란 말은 보편적으로 쓰임 받는 말이 되었다.
성경적으로도 < 두레운동 곧 공동체 운동 >은 중요하다. 사도행전 2장 첫 부분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교회가 시작되자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 2장 뒷부분의 성령공동체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면 공동체가 일어난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사도행전 2장 44~46절)
마을이 희망이다.(3)
마하트마 간디는 마을다운 마을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갖추어야할 기본 원칙들을 일러 준다. 간디가 일러 주는 기본원칙들을 근거로 마을공동체 성공의 여섯 가지 기본 원칙들을 적는다.
첫째는 사람 우위의 완전고용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사람이다.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부여하여 놓으신 행복에의 권리이다. 마을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타의에 의하여 불행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을 만큼의 일거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일거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자리가 없거나 배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자신이 배불리 먹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여야 한다. 심지어 장애자일지라도 자신의 능력에 맞는 만큼의 일을 하고 먹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땀 흘려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은 도둑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모든 사람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마을공동체의 경제적 이상은 평등한 분배이다. 경제적 평등이 평화로운 마을, 평화로운 세계로 나가는 지름길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등은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평등이다.
셋째는 이웃에 대한 봉사 곧 스와데시이다.
이웃에 봉사하는 일은 온 세계에 봉사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구체적인 길이다. 온 세상을 자신의 가족같이 여기고 봉사하는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머물면서 우주에 봉사하는 힘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을 성경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 Peace Maker라고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 하였다.
넷째는 자급자족이다.
마을은 생명유지에 필요한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단위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한 마을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자급자족하였다. 모든 마을은 자립적이어야 하고, 외부의 간섭 없이 생존을 누리고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자신들을 관리하여야 한다.
다섯째는 자발적으로 이루지는 협동이다.
마을은 협동에 의하여 그 이상을 실현한다. 마을 주민들은 협동을 통하여 공동의 선을 실현하여야 한다. 협동은 반드시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하여야 하고, 협동함으로 모두가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협동은 개인으로써는 이룰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킨다.
여섯째는 교육과 회의를 통하여 이루지는 소통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든 정보와 지식이 공유되어져야 한다. 정보와 지식의 공유는 마을이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편견에서 벗어나며 편 가름이 없게 되는 기본요소이다.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정보와 지식이 공개 되어야 하고, 대화와 회의를 통하여 합의 되어져야 한다. 특정인 몇 사람만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케 될 때에 거기서 갈등이 시작되게 된다. 투명한 공개와 개방, 활발한 토론과 대화, 회의를 통한 합의가 마을 공동체 성공의 3대 요소이다.
마을이 희망이다.(4)두레마을의 공식적인 이름은 < 땅과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 마을, 두레마을 >이다. 내가 이 이름으로 공동체 마을을 시작한 내력이 이러하다. 1974년과 75년에 내가 옥살이를 할 때다. 나 같은 정치범들은 주로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가끔은 일반수들이 있는 방에 합방시키는 때도 있었다. 한번은 일반수 8명이 있는 방으로 합방이 되었다. 나까지 9명이 있는 방인데 겨우 2평이 못되는 좁은 방이었다. 낮 동안에 앉아 있을 때는 견딜 만 하였으나, 밤에 취침할 때가 문제였다. 9명이 도저히 바로 누울 수 없기에 한쪽 어깨만 붙이고 모로 누워 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는 잠을 ‘칼잠 잔다’ 하였다.
그렇게 칼잠을 자는 처지에서도 방 식구끼리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특히 그런 방에서도 빈부차이가 심하여 부자 죄수는 불고기 사식을 들여다 먹고, 가난한 죄수들은 고기 냄새만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가 치밀어 서로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참다못한 나는 너 것 내 것 없이 현금도 치약도 사식도 모두 합하여 공동체로 살아보자고 제안하였다.
나의 제안에 양쪽이 모두 반발하였다. 있는 측에서는 “당신 빨갱이 사상 아냐?”하고 반발하고, 없는 측에서는 “예수쟁이들은 말만하는 거여. 그럼 당신 것부터 다 털어놔 봐”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좁은 방에서 서로 으르렁 거리며 다투고 살아가는 분위기에 참을 수 없어서 기도 드렸다.
"하나님 이들이 서로 나누고 함께 가지며 서로 위로하고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때 마침 19세 된 청년이 절도범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발에 걸린 동상이 악화되어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처지가 측은하여 아침저녁으로 발 마사지를 해 주며 기도하여 주었다. 그러기를 열흘 정도 계속하였더니 상처가 낫기 시작하였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본 사람들이 감동이 되었던지, 너 것 내 것 없이 공동체로 살아보자고 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소유구조가 달라지면 인심이 달라진다. 늘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 위로해 주고, 이젠 범죄생활 청산하고 새롭게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며 공동체의 힘을 실감케 되었다. 그리고 다짐하기를 언젠가 징역살이가 풀리면, 공동체 교회를 세워 공동체 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석방되기 전에 공동체 마을 이름을 < 두레마을 >로 작명까지 하게 되었다.
< 두레마을 >이란 이름은 조상들이 세웠던 마을 공동체의 이름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시작되자 너 것 내 것 없이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성령공동체, 생활공동체가 출현하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조상들이 살았던 두레전통과 성경의 성령공동체를 합하면 어떤 삶의 모습이 될까를 생각한 끝에 < 두레마을 >공동체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면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추진하는 체질이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남양만에서 < 두레마을 >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이다. 두레마을 공동체를 시작한지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두레마을은 그간에 엎치락뒤치락 온갖 사연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내 나이도 70중반에 들었기에 시간이 별로 없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제대로 된 공동체 마을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야구에 비유하여 표현하자면 9회 말에 멋있는 안타를 날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