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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9.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1. 그 칼을 손에 잡아 쓸 만하도록 빛나게 하되 죽이는 자의 손에 넘기기 위하여 날카롭고도 빛나게 하였도다 하셨다 하라 12. 인자야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 이것이 내 백성에게 임하며 이스라엘 모든 고관에게 임함이로다 그들과 내 백성이 함께 칼에 넘긴 바 되었으니 너는 네 넓적다리를 칠지어다 13. 이것이 시험이라 만일 업신여기는 규가 없어지면 어찌할까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 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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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9-10절).
날카롭고도 빛나는 여호와의 칼의 노래입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그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왜 작가는 남해에 널린 섬들을 버려졌다고 생각했을까요? 뭍에서 떨어져 나간 섬들이 어쩌면 당시 이순신의 처지와도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한 문장으로도 이순신의 외로움과 슬픔이 짙게 느껴졌습니다. 소설은 봄으로 시작하여 겨울로 끝납니다. 비록 버려진 섬일지라도 꽃은 피고 또 눈은 내립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칼과 임금의 칼 사이에서 바다는 아득히 넓었고 나는 몸 둘 곳이 없었다>고 진술합니다.
오늘 본문을 예언한 에스겔 선지자의 심경이 바로 이순신 같지 않았을까요? <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전하라>며 <칼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 하나님과 그 칼 앞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성들을 바라보며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요? <부르짖어 슬피 울고 싶다>(12절)는 말씀이나 <이것이 시험이라>(13절)고 한 고백이 그 점에서 다 공감이 되고도 남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는 이순신의 또 이런 독백이 나옵니다. <칼이 뜨거운 물건인지 차거운 물건인지를 나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렇습니다. 칼은 그것을 손에 쥔 자의 열망이어서 뜨겁고, 그 칼에 베이는 자들의 목숨을 가져가니 차갑습니다. <...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14절).
주님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마 10:34)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이 부른 여호와의 <칼의 노래>를 잊지 마십시오. 새해에는 늘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15절)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여호와의 칼을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성도가 되시길 빕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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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칼이여 칼이여>하며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던 에스겔 선지자의 심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칼은 강도의 손에 있으면 남을 해치는 살인의 도구지만 의사의 손에 있으면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메스가 됩니다. 여호와의 심판의 칼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구원의 칼임을 믿으십니까?
-올 한 해 늘 여호와의 <칼의 노래>를 기억하시며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자기관리에 더욱 힘씁시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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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주님, <너는 부르짖어 슬피 울지어다!>하신 대로 여호와의 날카로운 칼 앞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운명을 보며 이 시대 저희로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허락하신 이 새해에는 부르짖으며 슬피 울 일도, <칼의 노래>를 부를 일도 없게 해주시옵소서. 심판이 아니라 축복을 누리고, 슬픔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나날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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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 요새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마치 믿지 않아야 똑똑한 줄 알고 끊임없이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살면 어떤 것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런 끝없는 회의주의자나 모든 사실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평화도 없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얻기 원하면 어느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이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작자 미상의 글 ‘평화를 얻는 3대 원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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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의문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런 고백이 없다면 삶은 고통과 절망으로 평화를 얻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이해해야 믿겠다고 하면 어떤 것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은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며 평화의 원천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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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시편 31:21 | |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Praise be to the LORD, for he showed his wonderful love to me when I was in a besieged c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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