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이 없으면 백성들이 망할 짓을 골라서 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언 29장 18절)
한국교회는 아세아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교회이다. 한국교회가 아세아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교회라는 말은 아세아의 미래에 한국교회가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 아세아의 미래는 너무나 불투명하다. 중국과 일본이 다투고 있고, 북한이 기를 쓰고 핵무기를 가지려 한다. 인도가 대국으로 가는 힘을 기르고 있고, 동남 아세아 여러 나라들이 국력을 기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여러 해전 독일의 영성가 Rudolf Steiner는 "아세아의 미래는 Korea에 달려 있다. Korea가 미래의 아세아에 희망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며 생각하였다. ‘아세아에 희망을 주는 주체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가 될 것이다’ 생각하였다. 아니 한국교회가 그런 비전을 품고 그 비전을 현실화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야 함을 다짐하였다.
미국에 Billy Graham 목사란 분이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부흥사이다. 그분이 14년 전에 말하기를 “세계교회의 이니시어티브는 유럽교회, 미국교회에서 아세아교회, 아프리카교회로 넘어갔다. 섭섭한 말이지만 이미 넘어갔다. 다가오는 세기에 세계교회는 한국교회와 중국교회가 이끌어 갈 것이다” 하였다.
중국교회는 모택동이 지배하던 시절 문화 혁명기를 거치며 모진 박해 중에서 살아남은 교회이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큰 부흥을 이루어 지금은 중국 크리스천들이 1억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박해 중에 생존하느라 신학적, 목회적 기초가 약하여 아직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국교회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신학의 기초를 놓는 일, 목회자를 훈련시키는 일, 유년주일학교 운영, 교회음악, 대사회봉사 등에 자문과 지도를 요청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중국교회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하여 두 나라 교회 간에 깊은 연대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예수 아세아 건설"이라는 큰 비전을 위하여서다.
온 세계가 그러하지만 아세아에서는 기존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체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여야 할 때이다. 자본주의는 병들어 휘청거리고 있고 공산주의는 이미 저물고 있다. 옛 것은 지나가고 있는데 새 것은 아직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역사의 전환기에 교회가 빛을 발하여야 한다.
Vision 있는 신앙(2)
“인류의 미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비전에 달려 있다.”(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우리는 흔히 비전 있는 사람, 비전 있는 기업, 비전 있는 교회 등등으로 비전을 말한다. 그러나 막상 비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비전이란 무엇인가?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나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 보겠다.
"비전이란 한 국가, 한 기업, 한 교회, 심지어 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그 공동체의 구성원 전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힘을 모아 바라보고 나갈 미래의 목표이다."
그 목표가 선명하고 고상할수록 구성원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나갈 수 있는 힘이 더 커진다. 비전의 중요함에 대하여 나폴레옹 장군이 남긴 말이 있다. “인류의 장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비전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한 나라, 한 기업이 지지부진한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을 때에 비전 있는 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아 직면한 어려움을 거뜬히 극복하여 나가게 된다.
구약성경 잠언 29장 18절에 이르기를 “비전 없는 백성들은 망할 짓을 골라서 하게 된다”하였다. 국민들에게 비전이 있고 없는 것에 따라 국운이 좌우 된다. 그러기에 최고 지도자가 지녀야 할 덕목 중에 제1을 "비전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 하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몹시 염려한다.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비전으로 국민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영특하기에 지도자들이 비전만 제대로 제시하면 어떤 역경도 능히 극복하여 나갈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률과 노인 자살률이 OECD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다. 청소년들이 왜 자살을 하고 노인들이 왜 자살을 하는가? 그들에게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나가게 하는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요한 비전을 어디에서 주는가? 정부에서 주는가? 학교에서 주는가? 가정에서 주는가?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정부도, 학교도, 가정도 그 일에 실패하고 있다. 비전을 주지 못하는 정부, 학교, 가정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일을 감당하여야 하는가?
교회이다. 교회가 국민들에게,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노인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 힘을 감당할 힘을 지닌 교회이다. 구약성경 요엘서 2장에서 다음같이 이러 준다.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게 될 것이다.”(요엘서 2장 28절)
성령을 제대로 받고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믿음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면, 위대한 비전을 품게 된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에는 비전이 따르기 마련이다.
Vision 있는 신앙(3)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최고지도자의 과정을 제왕학(帝王學)이라 하였다. 최근 서양에서 제왕학에 준하는 과목을 대통령학이라 한다. 대통령학을 이름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최고지도자학이라 하겠다.
미국의 한 저명한 대통령학의 권위자가 대통령이 자신의 직을 원만히 수행함에 꼭 있어야 할 5가지 자질을 지적한 글이 있다. 내용을 읽어보면 굳이 대통령에게만 해당되는 자질이 아니라, 모든 지도자들이 공히 마음에 새겨야 할 자질이라 여겨진다.
첫째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둘째 자신의 비전을 국민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설득력
셋째 도덕적 일관성, Integrity
넷째 관용과 포용력
다섯째 열정, Passion
이들 다섯 가지 덕목 중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첫 번째로 손꼽힌다. 모름지기 지도자라면 어떤 조직,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이든 구성원들이 함께 바라보고 나아갈 미래의 목표로써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모세가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이다.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기를 <너는 내 백성을 인도하라>는 사명을 받고 난 후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상식적으로는 2가지 행동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첫째는 절대군주인 애급의 바로 왕에 대하여 <독재자를 타도하자>, <독재 군주를 물리치자>는 반체제 운동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째는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향하여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으로 견디며 참읍시다. 고생스럽더라도 믿음으로 견디면, 죽은 후에는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라고 위로하고 순종하도록 독려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 모세는 제3의 길을 제시하였다. 바로 왕의 체제 아래서는 어떤 종교가도, 어떤 정치가도 꿈꾸지 못하였던 대안(代案)을 제시하였다. 바로 가나안 땅의 비전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모세가 제시하는 새 땅에 대한 비전에 공감하게 된 백성들은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였다, 비전은 잠자는 백성들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
Vision 있는 신앙(4)
“말세에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구리라”(사도행전 2장 17절)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장점은 믿는 자들에게 비전을 심어 주고 꿈을 심어 준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받게 되면 청소년들이 예언을 하게 되고, 청년들이 비전을 보게 되며 늙은이들이 꿈을 꾸게 된다.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임하는 특성이요 증거다.
오순절 성령감림을 체험하자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충만케 되어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흉을 보았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말하였다.
“예루살렘 시민들이여 저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을 받아 성령 충만케 된 것입니다. 이는 오늘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수백 년 전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바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언자 요엘이 말하기를 ‘말세에 하나님께서 만인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니, 성령을 받게 되면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비전을 품게 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는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 자녀들이 예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예언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점치는 것과는 전연 다르다. 성경의 예언은 길 없는 시대에 길을 찾아 선포하는 것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이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참 길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면 청년들이 비전을 본다 하였다. 지금 이 나라는 젊은이들도 늙은이들도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이런 시대에 성령 받은 젊은이들이 만인이 바라보고 나아갈 목표를 분명히 보여 주게 된다. 비전을 품은 젊은이들이야말로 교회의 자랑이요 시대의 희망이다. 교회는 젊은이들에게 비전을 심어 준다. 대학이 못 주고 나라가 못 주고 부모들이 주지 못하는 비전을 교회가 준다.
성령을 받으면 늙은이들이 꿈을 가지게 된다. 지금은 이른바 노령화 시대이다. 수명이 늘어나 노인들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 노인들이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나날을 보내며 젊은이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성령 받은 노인들은 다르다. 꿈을 꾸며, 그 꿈이 성취되게 하는 일에 인생을 투자한다.
<꿈꾸는 노인>이야말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노령시대를 보내는 축복이요 자랑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여 왔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의 철학은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칼 맑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장 15절)
칼 맑스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목사였고 아버지는 장로였다. 그러나 유달리 총명하였던 그는 자라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났다. 이상주의에 불탔던 청년 맑스는 어떻게 하면 평등한 사회, 빈부귀천이 없는 계급 없는 사회와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까에 몰두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 비전을 추구하는 데에 일생을 투자하였다.
고국 독일에서 쫒기는 몸이 된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모진 가난 속에서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이론을 세우는 일에 생애를 걸었다. 그는 자신의 비전이 인류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그릇된 비전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로 인하여 적어도 5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 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다. 그는 그릇된 비전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재앙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는 대영제국 국회도서관에 18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개근하며 공산주의 사상의 바이블격인 자본론을 저술하였다. 그간에 자신의 딸은 영양실조로 죽고 아내는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딸을 장례하고 나서도 여전히 국회도서관으로 가서 자본론을 쓰기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그렇게 일생을 걸었던 공산주의가, 천국을 약속하고서 지옥을 창출하였음이 드러났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수천만의 생명이 희생당한 후에 드러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다른 비전을 가르치셨다. 사랑을 무기로 하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전이다. 사랑과 용서, 희생과 헌신으로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는 비전이다. 그의 제자들은 세상의 변두리 유대 땅에서 별 볼일 없이 살아가던 하찮은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께서 깨우쳐 주신 비전에 삶을 바쳤을 때에 “사랑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 혁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본을 보이시고, 제자들이 목숨을 바쳐 가며 시작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전은 지금도 숱한 젊은이들이 삶을 던져 헌신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의 비전은 중단 없는 전진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에게는 3가지 비전이 있다. 나의 비전이 한국교회 전체의 비전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우리 겨레 전체의 비전이 되어지기를 기도하며 이 글을 쓴다.
첫째는 성서한국의 비전이다.
이사야서 11장에 이 비전에 합당한 말씀이 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니라"(이사야서 11장 9절)
물이 바다를 덮고 있듯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성서의 지식이 제주도 한라산으로부터 백두산 골짜기까지 차고 넘치는 것이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그리고 가정마다 일터마다 차고 넘치는 시대가 오게 하는 것이 성서한국의 비전이다.
겨레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천년은 불도(佛道)의 시대였다. 그 시대엔 온 백성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려 힘썼다. 그리고 그 시대에 원효, 원광, 의천, 지눌 같은 세계적인 큰 스님들이 배출되었다. 내가 여러 해 전 일본을 방문했을 적에 한 불교대학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 대학에서 신라의 학승 원효의 저서를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조선조 5백년은 유학(儒學)의 시대였다. 그 시절엔 산골 마을까지 서방이 세워져 서당마다 공자와 맹자를 대표로 하는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 시절엔 정치제도나 풍속도 유학의 전통을 따라 이루어졌다. 그 시절에 역시 이퇴계, 이율곡, 정약용 같은 걸출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율곡 선생이 활약하였던 시대는 독일의 칸트가 활약하였던 시대와 동일하다.
칸트의 유명한 저서 3부작 중의 첫째가 순수이성비판이다.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을 것인가?’를 주제로 삼은 인식론을 다룬 내용이다. 그런데 칸트가 인식론에서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주제를 동시대의 조선의 유학자 율곡의 이기론(理氣論)에서 극복하고 있다. 우리는 신라 불교의 원효 큰 스님이나 조선조 유학의 이율곡 선생 같은 선조들에 대하여 긍지를 품고 자랑스러워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다가오는 통일한국 시대는 어떤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인가. 성서의 가르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7천만 동포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 가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이 꿈, 이 비전이 성서한국에의 비전이다.
나에게는 3가지 비전이 있다. 첫째는 어제 글에서 소개한 < 성서한국 >의 비전이다. 둘째는 < 통일한국 >의 비전이다. 올해가 해방 70년째이자 분단 70년째 되는 해이다. 지금처럼 남북분단 상황에서는 남도 북도 활로가 열리지 않는다. 우리 민족이 다시 한 번 웅비하려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남북이 갈려진 지금의 상황에서는 남도 북도 번영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없다.
한 미국의 연구소의 전망에 의하면 통일한국을 이룬다면, 20년 안에 세계 5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분단 상태 아래에서는 남도 북도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감사하게도 분단 70년의 대결에서 남한체제가 승리하였다. 그간 몇 번이나 위기를 만났었지만 위기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위기를 극복하여 왔다.
이제 체제경쟁에서는 남한이 완전히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의 위기를 절실히 느끼기에 핵무기에 매달려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은 북한에 큰 이익을 주지 못한다. 기껏해야 현 상황을 어느 기간까지 지속시킬 수 있을 따름이다.
큰 틀에서 보면 북한의 핵은 자신들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자충수로 작용케 될 것이다. 우리 남한으로써는 북한의 핵에 너무 큰 비중을 두지 말고, 긴 안목으로 통일의 주도권을 펼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통일한국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지금 단계에서 취할 행동은 5가지이다.
첫째는 남한 내 여론의 통일이다. 지금처럼 국론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통일이 고난하다. 오히려 북측에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둘째는 강력한 국방력의 구축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국방력을 튼튼히 하여야 한다.
셋째는 균형 잡힌 외교력의 발휘이다. 서독의 경우 거의 30년간 통일부 장관만큼은 바꾸지 않았다. 정권이 몇 차례 바뀌었어도 통일정책은 일관되게 유지하였다. 이를 위해 통일부 장관은 바꾸지 않았고 통일외교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넷째는 북한 동포들의 민심을 장악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최고 최선의 전략을 구사하여 대북 심리전을 펼쳐 나가야 한다. 북한 주민들이 남한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게 하여야 한다. 이는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단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할 따름이다.
다섯째는 북한 동포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과감하고 효율적인 지원이다. 식량, 비료, 농기구, 농약, 의약품, 의료지원, 숲 가꾸기 등에 획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런 투자는 통일비용을 줄이는 것이기에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통일만큼은 북한 동포들의 민심을 얻는 편이 승리한다. 그리고 체제 경쟁에서 우리가 승리하였기에 우리 쪽이 너그러워야 하고 문을 먼저 열어야 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Vision 있는 신앙(8)
나에게는 3가지 비전이 있다. 나의 비전이 두레운동의 비전이요, 두레의 비전이 한국교회 전체의 비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첫째가 성서한국의 비전이요 둘째가 통일한국의 비전이다.
성서한국과 통일한국에 대하여는 그제와 어제 글에서 적은 바이기에 오늘은 선교한국의 비전을 적을 차례이다.
사도행전 16장은 성경 중에서도 특이한 장이다. 세계사를 변화시킨 큰 사건이 적혀 있는 장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아세아 지역을 선교하기 위하여 장도에 올라 여행이 진행 중인 때이다. 느닷없이 유럽인인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으로 나타나 바울에게 유럽 선교를 호소하는 요청을 하였다.
너무나 생생한 환상이었던지라 바울은 선교의 방향을 아세아에서 유럽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을 깨닫고는 선교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아세아 지역 선교를 포기하고 유럽 지역으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선택이 기독교가 유럽에서부터 일어나게 된 시작이었다. 기독교 선교가 동진(東進)에서 서진(西進)으로 방향을 바꾸어지게 된 계기이다.
그래서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로 가서 교회를 세우고, 희랍을 거쳐 로마로 선교운동이 진행되었다. 그 뒤 3백년이 못되어 로마를 석권하고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미국에서 한국과 아세아로 기독교 선교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는 서진운동이 시작 되었다.
이제 한국교회는 아세아에서 기독교가 가장 성공한 교회가 되었다. 한국교회가 아세아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세아의 미래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책임이 있다는 말이 된다. 한국교회는 예수 아세아, 평화 아세아를 위하여 책임이 있는 교회이다. 그리고 아세아 교회를 발판으로 21세기 이후 세계 선교에 앞장 서야 할 책임이 한국교회에 있다.
지금 한국교회가 해외에 파견한 선교사의 숫자는 2만 천명에 이른다. 적지 않은 숫자이다. 숫자로는 세계에서 3위이지만, 인구비례로는 한국교회가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셈이다. 교회사와 세계사를 공부하다 보면 어느 시대, 어느 교회나 해외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와 그 나라를 반드시 축복하셨다.
한국교회가 어려운 여간 중에서도 인구 비례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다가오는 통일한국 시대에 한국교회와 우리 겨레가 세계사를 선두에서 주도하는 교회와 나라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된다는 예고라 하겠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다. 한국교회가 아세아 선교에서 열매를 거두고 나아가 오대양 육대주에 복음을 들고 나아갈 때에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우리 민족을 축복하시고 세계사를 주도하는 선두에 세우게 되실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하자는 것이 나의 비전이요, 두레의 비전이요, 한국교회의 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