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범이네할배 2019. 5. 31. 19:35

다기망양 多岐亡羊

(多:많을 다. 岐:가닥나뉠 기. 亡:잃을 망. 羊:양 양)

달아난 양을 찾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서 양을 잃었다는 뜻. 곧 ① 학문의 길이 다방면으로 갈려 진리를 찾기 어려움의 비유. ② 방침이 많아 갈 바를 모름.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이름은 주(朱), B.C.395?∼335?]와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주]楊子: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노자(老子)의 무위(無爲)·독선(獨善)의 설을 도입하여 염세적인 인생관으로 자기 중심적인 쾌락주의를 주장함

다난흥방 多難興邦 나라에 어려움이 많을수록 조야가 단결하고 분발하여 부흥을 일으킨다.

다다익선(多 多 益 善) :

(多:많을 다. 益:더할 익. 善:착할 좋을 잘할 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또는 능력의 무한함을 과시.

한(漢)나라 고조 유방(劉邦)은 명장으로서 천하 통일의 일등 공신인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계략을 써 그를 포박한 후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키고 도읍 장안(長安)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고조는 한신과 여러 장군들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렇게 물었다.

"과인은 몇 만의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장수감이라고 생각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폐하께서는 한 10만쯤 거느릴 수 있으실 것으로 생각하나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예, 신(臣)은 '다다익선'이옵니다."

"다다익선? 핫핫핫…‥."

고조는 한바탕 웃고 나서 물었다.

"다다익선이란 그대가 어찌하여 10만의 장수감에 불과한 과인의 포로가 되었는고?"

한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병사의 장수가 아니오라 장수의 장수이시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의 포로가 된 이유의 전부이옵니다. 더욱이 폐하 자리는 하늘이 주는 것이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多聞博識(다문박식) 견문이 넓고 학식이 많음

多事多難(다사다난) 여러 가지 일이 많은데다 어려운 일도 많음. 비-내우외환(內憂外患)

多事多忙(다사다망) 일이 많아 매우 바쁨.

다사지추 多事之秋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 때를 말한다.

多數可決(다수가결) 다수에 의하여 가부를 정함.

多言或中(다언혹중) 말이 많으면 혹 맞는 말이 있음.

다재다병 多才多病 재주가 많은 사람은 흔히 몸이 약하여 잔병이 많음을 뜻함.

다재다예 多才多藝 재능과 기예가 뛰어남. 다재다능(多才多能 ).

다전선가 多錢善價 밑천이 많으면 장사를 잘 할 수 있다

多錢善賈(다전선고) 재물이 많으면 장사를 잘 한다는 뜻으로 조건이 좋은 사람이 성공하기도 쉽다는 말의 비유

多情多感(다정다감) 애틋한 정도 많고, 느낌이나 생각이 많음.

多情佛心(다정불심) 다정다감하고 착한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다취다화 (多 嘴 多 話) 사람이 많으면 말도 많다

단금지교 (斷 金 之 交) 쇠를 자를 정도로 절친한 친구사이를 말함

단기지교 (斷 機 之 敎)

(斷:끊을 단, 機:베틀 기, 之:어조사 지, 敎:가르칠 교)

베를 끊은 가르침.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가르침

맹자는 전국시대 중엽에 태어난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 유학에 나가 있던 맹자가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베를 짜고 있었다.

"네 공부는 어느 정도 나아갔느냐?"

"아직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를 옆에 있는 칼로 끊어버렸다. 맹자가 섬찟하여 물었다.

"어머니, 그 베는 왜 끊어버리시나이까?"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학문을 그만둔다는 것은, 내가 짜던 베를 끊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군자란 모름지기 학문을 배워 이름을 날리고, 모르는 것은 물어서 앎을 넓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평소에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도 위험을 저지르지 않는다. 지금 너는 학문을 그만두었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꾼으로 뛰어다녀야 하고, 재앙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계를 위하여 베를 짜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여자가 그 생계의 방편인 베짜기를 그만두고, 남자가 덕을 닦는 것에 떨어지면, 도둑이 되지 않는다면 심부름꾼이 될 뿐이다. "

맹자가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쉬지 않고서 배움에 힘써, 자사(子思)를 스승으로 섬겨, 드디어 천하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단기지계 斷機之戒 맹자가 수학 도중에 돌아오자, 그의 어머니가 짜던 베의 날을

끊어 훈계했다는 고사에서 비롯, 학문을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말.

單騎千里(단기천리)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가는 관우의 모습을 묘사한 고사. 말 하나를 타고 천리를 내달린다는 뜻.

단도부회 (單 刀 赴 會) 칼 한 자루를 들고 모임에 나간다는 뜻으로, 여기서 모임이 란 위험한 자리를 뜻한다.

단도직입 單刀直入 너절한 서두를 생략하고 요점이나 본문제를 간단명료하게 말함. 단도로 곧장 찌름. 구차한 것은 떼어버리고 곧바로 핵심을 들고 나오다.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서슴지 않고 정면으로 용건을 표현함.

斷頭將軍(단두장군) 파서 관에서 장비에게 패한 엄안이 장비 앞에서 죽어도 항복할 수 없다. 어서 목을 쳐라 에서유래

단사두갱 簞食豆羹 簞은 밥을 담는 그릇. 豆는 국을 담는 椀같은 것으로 음식의 분량이 적은 것을 말한다.

단사표음 (簞 食 瓢 飮)

(簞:도시락 단. 食:밥 사. 瓢:표주박 표. 飮:마실 음)

도시락 밥과 표주박 속의 국'으로 구차하고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말함. 준말[ 簞瓢]

簞은 본디 대나무(竹)로 엉성하게(單) 얽은 작은 소쿠리를 뜻하며, 食는 '먹다'일 때는 '식', '밥'일 때는 '사'로 발음한다.

孔子는 일생동안 무려 3천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 가장 총애했던 弟子는 顔回(일명 顔淵)였다. 首弟子중의 首弟子였던 셈이다.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으며(聞一知十), 워낙 학문을 좋아해 나이 29세에 벌써 백발(白髮)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덕행(德行)이 뛰어나 스승인 孔子 자신도 때로 그로부터 배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물주(造物主)는 그에게 뛰어난 재능과 함께 가난을 안겨 주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해 끼니 거르기를 밥먹듯 했으며 평생 지게미 조차 배물리 먹어본 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 뿐인가. 나이 서른 하나에 요절(夭折)하고 말았으니 孔子가 오죽했으면 그의 죽음을 두고 '하늘 탓'이라고 통탄했을까. 그러나 그는 가난을 운명인양 받아들이고 늘 낙천적으로 살았으며 덕(德)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孔子는 그를 찬탄해마지 않았다.

"장하구나 顔回여! 簞食瓢飮과 누추한 뒷골목에 살면서도 불평이 없구나. 그럼에도 성인(聖人)의 道를 추구하기 여념이 없으니 이 얼마나 장한가."

물론 지금 顔回와 같은 삶을 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식주가 해결된 지금 과연 정도(正道)를 걷고 있는 者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단순호치 丹脣皓齒 붉은 입술과 하얀 이란 뜻에서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이르는 말

단식표음 簞食瓢飮 변변치 못한 살림

簞食壺裝(단식호장) 도시락밥과 단지에 넣은 음료수의 뜻으로 적은 분량의 음식물의 비유, 길 갈 때 휴대하는 음식물

斷義絶親(단의절친) 가족관계와 의리를 끊는 것

단 장(斷 腸)

(斷:끊을 단. 腸:창자 장)

창자가 끊어졌다는 뜻. 전하여, 창자가 끊어질 듯한 슬픔의 비유.

진(晉:東晉, 317∼420) 나라의 환온(桓溫)이 촉(蜀) 땅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자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三峽)을 통과할 때 있었던 일이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서 배에 실었다. 어미 원숭이가 뒤따라왔으나 물 때문에 배에는 오르지 못하고 강가에서 슬피 울부짖었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자 어미 원숭이는 강가에 병풍처럼 펼쳐진 벼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배를 쫓아왔다. 배는 100여 리쯤 나아간 뒤 강기슭에 닿았다. 어미 원숭이는 서슴없이 배에 뛰어올랐으나 그대로 죽고 말았다.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니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환온은 크게 노하여 원숭이 새끼를 붙잡아 매에 실은 그 부하를 매질한 다음 내쫓아 버렸다고 한다.

魚叔權의 稗官雜記에 중종 17년(1522년)에 서해의 玉谷에서 놀았을 때 홍준이라는 사람이 꾀꼬리 어미와 새끼를 기르는데 어미와 새끼를 각 각 두고 소리는 듣되 보지 못하게 하여 기르는데 하루는 새끼를 어미의 새장에 넣어 주자 어미는 쓰러져 죽고 말았는데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여덟 토막이나 되었었다. 중국에서 유래한 고사성어이지만 의의는 동일하다. 초식하는 동양인은 육식의 서양인보다 창자가 가늘고 5-6M가 더 길다.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주] 삼협 : 사천(四川) 호북(湖北) 두 성(省)의 경계에 있는 양자강(揚子江:長江) 중류의 세 협곡(峽谷). 곧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 예로부터 유명한 경승지(景勝地). 현재 큰 댐을 건설하는 공사가 진행 중에 있음.

斷長補短(단장보단) 긴 곳을 잘라 짧은 곳을 메워 들쭉날쭉한 것을 곧게 한다.

簞瓢陋巷(단표누항) 누추한 거리라는 뜻으로 소박한 시골 살림살이를 가리킴.

獺多魚擾(달다어요) 수달이 많으면 물고기가 두려워서 혼란에 빠지듯 관리가 많으면 백성이 핍박을 받는다.

達人大觀(달인대관) 달인은 사물의 전 국면을 관찰하여 공명정대한 판단을 한다는 말

담대심소 膽大心小 담력은 커야 하지만 마음을 쓰는데는 조심해야 한다

談笑自若(담소자약) 위험이나 곤란에 직면해 걱정과 근심이 있을 때라도 변함없이 평상시와 같은 태도를 가짐.(=泰然自若)

談人人至(담인인지) 자리에 없는 사람의 말을 하면 공교롭게도 그 사람이 옴.

담호호지담인인지 談虎虎至談人人至 호랑이를 말하니 호랑이가 오고 사람을 말하니 사람이 온다.

담하용이 (談 何 容 易)

(談:말할 담. 何:어찌 하. 容:쉬울 용. 易:쉬울 이)

무슨 일이든지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쉽지 않으므로 쉽게 입을 여는 짓은 삼가야 한다는 말.

동방삭(東邦朔)은 전한(前漢) 중엽 사람이다. 그는 정직하며 유머를 좋아 했다. 무제(武帝)가 전국의 인재를 모집했을 때 고향의 염차(厭次:산동성)에서 수도 장안으로 나가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상시랑(常侍郞)으로 발탁되었다.

무제는 장안 근처에 황실 전용 사냥터 '상림원(上林苑)'을 만들려고 했다. 동방삭은 국고를 비게 하고, 백성의 생활 밑천을 빼앗는 짓이라며 반대했으나 무제는 듣지 않았다. 그는 부국 강병책을 건의했지만 채택되지 않아 '비유 선생론(非有先生論)'이라는 풍자문을 써서 간했다. 거기에는 비유 선생과 오왕(吳王)이라는두 가공 인물이 등장한다.

비유 선생은 오왕을 섬긴 지 3년이 되지만, 조금도 정견을 발표하지 않았다. 오왕이 어이가 없어서 "뭔가 말을 해주시오"하고 요망했지만, 선생은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오왕은 안달이 났다.

"말해 주시오. 뭐든 듣겠소."

"좋습니다. 입을 여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간언하다 죽은 충신의 이름을 나열하고는 또 거듭 말했다.

"입을 열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이오!(談何容易)

그는 계속해서, 알랑거려 중용된 인물, 임금이 포악했기 때문에 세상을 피한 인물의 이름을 들어 충신을 멀리하고 소인을 등용한 어리석음을 말했다.

"입을 열기가 어찌 쉬운 일이오!"

선생은 또 현자가 명군을 만나 서로 도와 가며 나라를 일으키고 융성케 한 사례도 들어 군주로서의 마음가짐을 말했다.

당구삼년폐풍월 (堂 狗 三 年 吠 風 月) 서당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

堂狗風月(당구풍월) 사당 개가 풍월을 읊음. 무식한 자도 유식한 자와 같이 있으면 다소 유식해진다는 뜻

당국자미 當局者迷 직접 그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그 실지 사정에 어둡다

唐突西施(당돌서시) 당돌한 서시라는 뜻으로,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라는 의미이다.

당동벌이 (黨 同 伐 異)

(黨:무리 당. 同:한가지 동. 伐:칠 벌. 異:다를 이)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한패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함.

후한(後漢)에서는 제4대 화제(和帝) 이후로 역대 황제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래서 황태후가 섭정이 되고, 그 일족인 외척이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 외척에 대항하여 이를 타도하는 역할을 주로 한 것이 환관의 세력이었다. 그리하여 후한 말기에는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권력을 장악하고 사복을 채우는 썩어 빠진 정치 상황이 일반이었다.

외척이나 환관에 의한 정치의 사물화(私物化)에 강한 불만을 품은 것은 지방의 호족이나 양반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강직한 관료를 중심으로 당파를 결성하여 외척이나 환관의 정권당에 대항했다. 이리하여 서로 세력을 다투는 격심한 삼파전이 전개되었다.

환관당은 이윽고 외척 세력을 궤멸시키고, 지식인당에 대해서도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그 결과 정치를 맡아 보아야만 할 지식인 관료층이 완전히 황실을 저버리게 되어 후한 왕조는 자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로 보아, 가공할 파벌 싸움은 양식 있는 사람들의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식을 제거시켜 집단 전체를 활력을 잃은 상태로 만들었다. 더욱이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나무랄 데 없는 군자들인데, 일단 당파를 결성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엄두도 나지 않는 짓거리를 당파의 이름으로 아주 손쉽게 해낸다.

당랑거철 (螳 螂 拒 轍)

(螳:버마재비 당. 螂:버마재비 랑. 拒:막을 거. 轍:수레바퀴 자국 철)

사마귀[螳螂]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가로막는다는 뜻. 곧 ① 허세. ② 미약한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것을 비유.

①《한시외전(韓時外傳)》<권팔(卷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B.C.794∼731)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螳螂之斧]'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허, 맹랑한 놈이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호종하던 신하가 대답했다.

"사마귀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놈이 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가도록 하라."

[주]《한시외전》에서의 '당랑지부(螳螂之斧)'는 사마귀가 먹이를 공격할 때에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모습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흡사한데서 온 말이나 '당랑거철'과 같은 뜻으로 쓰임.

②《문선(文選)》에 보면 '당랑거철'은 삼국 시대(三國時代)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陳琳)이란 사람이 유비(劉備) 등 군웅(群雄)에게 띄운 격문(檄文)에도 나온다.

"조조(曺操)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袁紹)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螳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③《莊子》의 <인간세편>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어느 날 장자는 질문을 받았다. 그에 대한 물음과 답변이다.

"광포하기 이를 데 없고 지혜 업는 군왕을 섬기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우선은 신중하게 자신의 행동을 바로 잡아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화하도록 힘을 써야 한다. 상대를 대할 때에 사마귀처럼 두 발을 치켜들고 수레바퀴에 덤비는 듯한 행동(螳螂拒轍)은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다."

[동의어]당랑지부(螳螂之斧), [유사어]당랑규선(螳螂窺蟬)

당랑박선 (螳 螂 搏 蟬)

螳:사마귀 당, 螂:사마귀 랑, 搏:잡을 박, 蟬:매미 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엿보고 있지만 그 사마귀는 뒤에서 까치가 노리고 있음을 모른다. 눈앞의 이익을 탐하다가 눈이 어두워져 바로 뒤에 닥칠 화를 알지 못한다는 뜻.

어느날 장자가 사냥을 즐기고 있는데 남쪽에서 큰 까치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장자의 이마에 스쳐 근처 밤나무 숲에 앉았다. 이상하게 생긴 그 까치는 날개의 길이가 일곱 자, 눈 둘레는 한 치나 되었다.

까치를 한참 바라보던 장자는 혼자 생각했다.

'저 놈은 분명히 까치 같아 보이는데 저렇게 넓은 날개를 가지고도 왜 높이 날지 못하고 겨우 밤나무 숲에나 앉고 저렇게 큰 눈을 가지고도 어째서 사람의 이마를 스칠 정도로 잘 보지 못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자는 옷깃을 걷어올리고 재빨리 까치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그런데 까치 주변을 살피던 장자의 눈에 실로 기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자기가 겨누고 있는 까치는 풀잎의 사마귀를 노리고 있고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세상 모르고 맴맴 울어대는 매미를 노리고 있는게 아닌가(螳螂搏蟬)'. 모두 자기가 노리는 사냥감에 정신을 빼앗겨 자기 몸의 위험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利를 추구하는 자는 害를 불러들이는구나."

장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활과 화살을 팽개치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때 뒤쫓아 온 밤나무 숲을 지키던 사람에게 붙잡힌 장자는 밤도둑으로 몰려 심한 욕설을 들어야 했다. 까치를 겨누던 장자도 자기 뒤에서 자기를 노린 밤나무지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3개월 동안 장자는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뜰에는 나오지 않았다.

당랑재후(螳 螂 在 後) 사마귀가 화를 내며 발로 수레의 가는 길을 막음.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대항하는 것을 말한다.

당랑지부(螳 螂 之 斧) 사마귀가 앞발을 들어 수레를 막는다(분수도 모르고 강한 적에 반항하여 덤벼듦을 비유한 말).

당랑포선(螳 螂 捕 蟬) 눈앞의욕심에만눈이어두워덤비면결국큰해를입게된다는뜻

당비당차(螳 臂 當 車) 사마귀가 발을 벌리고 수레를 막듯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임

대간사충 (大 姦 似 忠)

(大:큰 대. 姦:간사할 간. 似:같을 사. 忠:충성 충)

악한 사람이 본성을 숨기고 충신처럼 보임

송(宋)나라 제5대 영종(英宗)은 재정 개혁에 힘썼다. 그러나 즉위한 지 겨우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신종이 19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아버지 영종이 이룩하지 못한 개혁을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의 신종을 도와 왕안석(王安石)이 개혁을 추진시켰다. 그는 신종의 신임을 얻어 조정 안의 보수 반동 세력과 재야의 지주, 부상(富商) 계급의 세찬 비난과 반대 속에서 잇달아 새로운 법을 공포했다.

왕안석이 재상에 취임하는 것을 가장 반대한 사람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의 여회(呂悔)였다. 여회는 왕안석을 탄핵하는 글을 신종에게 올렸다.

그는 "대간은 충과 비슷하고, 대사는 신과 흡사하다(大姦似忠 大詞似信)"며, 표면을 질박하게 보이면서도 흉중에는 간사한 음모가 있으며, 교만하고 황실을 업신여기며 음험하여 남을 해치는 대간이라하여 앙안석의 잘못을 조목조목 들고 있었다.

그러나 신종의 왕안석에 대한 신임은 변치 않아 여회에게 탄책문의 취소를 종용했다. 그러나 여회는 승복하지 않고 더욱더 왕안석을 비난했기 때문에 신종은 여회를 파면하고 지방으로 좌천시켰버렸다.

[주]왕안석 : 1021~1089. 북송(北宋)의 정치가. 부국강병을 위한 신법(新法)을 제정 실시함. 신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고 개혁 정치를 적극 도와 추진시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상 자리에서 물러남.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大喝一聲(대갈일성) 분별이 없음을 주위하기위해 큰소리로 한방 꾸짖는 것.

대강동거(大 江 東 去 ) : 큰 강물은 동으로 흘러든다는 뜻

大經大法(대경대법) 공명정대한 원리와 법칙

大驚失色(대경실색) 크게 놀라서 얼굴색이 변함.

대공무사 (大 公 無 私) 매우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다는 뜻이다.

대공무사 (大 公 無 事)

(大:큰 대. 公:공변될 공. 無:없을 무. 事:일 사)

지극히 공정해 사사로움이 없음. 대의를 위해 사사로움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함.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 평공(平公)이 신하 기황양(祁黃羊)에게 물었다.

"지금 남양현(南陽縣)의 현장(縣長)이 공석중인데 누구 마땅한 사람이 없을까."

기황양은 주저 없이 말했다.

"해호(解狐)가 좋을 것입니다. 그 자라면 훌륭히 직책을 수행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러자 平公은 매우 의아하다는듯이 물었다.

"아니,해호라면 경의 원수가 아닌가. 왜 하필이면 자신의 원수를 추천하는고."

"아닙니다. 공께서는 「마땅한 사람」을 물으셨을 뿐 그가 저의 원수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平公은 호래를 남양현의 현장(縣長)으로 보냈고 그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얼마가 지나 平公이 또 물었다.

"현재 조정에는 법관(法官) 자리가 비어 있네. 누가 적당할까."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인 기오(祁午)를 추천했다. 이번에도 平公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祁午라면 그대의 아들이 아닌가. 자기 아들을 추천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이번에도 기황양의 대답은 똑같았다. 물론 기오는 훌륭하게 일을 처리했다.

孔子는 기황양이야말로 대공무사(大公無私)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사람의 평가가 재능보다는 '관계'에 따라 좌우되곤 한다. 大公無私는 커녕 대사무공(大私無公)인 셈이다

大巧若拙(대교약졸) 훌륭한 기교는 도리어 졸렬한 듯함.

대기만성(大 器 晩 成)

(大:클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는 뜻. 곧 ①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의 비유.

② 만년(晩年)이 되어 성공하는 일. ③ 과거에 낙방한 선비를 위로하여 이르던 말.

① 삼국 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란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 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대기만성'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②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인데, 복파장군이란 전한(前漢) 이후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 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대기만성'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재목으로 다듬어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③《노자(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隅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 긴 안목으로 봐 주자는 자애어린 이 말이, 요즈음에는 각 분야에서 '늦되는 사람'에게 위로 겸 농담조로 얼버무릴 때에도 쓰임.

대단원 (大 團 圓)

( 大:큰 대. 團:둥글 단. 圓:둥글 원)

보름달처럼 둥근 양귀비의 얼굴. ① 일의 마무리를 둥글넓적하게 마무리 짓는다. ② 연극 같은 것에서 사건의 엉킨 실마리를 풀어 결말을 짓는 마지막 장면. ③ 맨 끝. 대미(大尾)

당(唐) 현종과 낭만적인 사랑을 나눈 양귀비(楊貴妃). 그녀의 본래 이름은 양옥환(楊玉環)이다. 고아 출신인 그는 양씨 집안에 양녀로 들어간 인연으로 양씨 성을 얻었다. 그녀는 장성하여 수왕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다.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 그는 담달리 아름다운 양옥환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불행을 맞이한다. 그 옛날 당고종이 부황인 태종의 후궁 무씨를 은애하여 왕후로 맞아들이면서 당나라의 비극이 시작 되었으니 그것은 어김없이 지나간 비극의 역사를 되짚어 갔다.

현종은 양귀비를 본 순간 그녀만을 총애하였다. 그 당시 현종은 56세였으며, 양귀비는 33세였다. 현종은 양귀비를 후궁으로 삼기 위해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남궁에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거처를 태진궁이라 했다. 비록 그녀가 귀비였지만 그 권세는 황후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남다른 관능미가 있었다. 그러한 육체의 미묘함 때문에 현종은 양귀비에게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둘은 추야장 깊은 밤을 가볍게 흘려보내고 서교의 온천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사랑이 뜨거울수록 봄밤이 짧듯 나라는 점점 쇠약해졌다.

백낙천은 <장한가>에서 '온천수활세응지(溫泉水滑洗凝脂)'하여 '미끄러운 온천물에 옥 같은 살결을 씻고 있다'고 읊었다. 양귀비가 비록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그녀의 질투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그로 인해 양귀비는 두 번이나 궁에서 폐출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양귀비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 현종은 맥이 달아나버린 사내에 불과했다. 궁안 생활은 암흑이며 지옥이었다. 그러나 보니 매사에 의욕이 있을 수 없었다. 현종은 서둘러 양귀비를 불러들였다. 다시 궁안에 들어온 양귀비는 온갖 교태로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정에서는 이임보. 양국충 등의 간신배들이 날뛰었으며,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긴 채 정사는 아예 뒷전이었다. 이렇게 되니 초기에 이룩했던 '개원의 치'는 황폐해져 갈 뿐이었다. 결국 황폐한 정치는 안록산의 난을 불러들였고 양귀비는 고역사(高力士)에게 액살 당하는 비운을 맞이한다. 사람이 처세하는 데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절도 있는 행동이다. 이를테면 일말의 허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절도 있고 대쪽 같은 행동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둥글둥글한 원만한 행동이다. 모 난데 없이 매사에 원만한 양귀비의 얼굴 같은 이른바 대단원(大團圓)이다.

對踏兩端(대답양단) 상반되는 양끝을 밟는다고 뜻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감

代代孫孫(대대손손) 대대로 내려오는 자손.

대도무문 大道無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道理나 정도正道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

중국의 혜가선사가 구도를 위해 폭설 속의 소림사 달마조사를 찾아갔는데 눈이 가슴까지 쌓이는데 달마조사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혜가선사는 왼쪽 팔을 손수 잘라 속세의 그 많은 문을 헤쳐 無門의 앞에 이르렀음을 선문에 입증하고 入寺했다.

大同團結(대동단결) 많은 사람. 여러 갈래의 당파가 큰 덩어리로 한 데 뭉치다.

대동소이 (大 同 小 異)

( 大:큰 대. 同:한가지 동. 小:작을 소. 異:다를 이)

크게는 작고 작게는 다르다. 그것이 그것 정도로 쓰임

장자(莊子)는 <天下篇(천하편)>에서 묵가와 법가(法家)의 학설을 비판하고 도가(道家)의 사상을 선양했다. 장자의 친구 혜시(惠施)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은 땅보다 낮고 산은 연못보다 평평하다. 해는 중천에 뜨지만 장차 기울어지고 만물은 태어나지만 장차엔 죽는다. 크게 보면 한가지지만 작게 보면 각기 다르다.'

만물은 모두 같고 모두 다르다고 하는 것이 대동소이(大同小異)다. <소요유편>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적인 감각기능에만 들을 것을 못 듣고 볼 것을 못 본다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지각 능력에도 그와 똑같다는 것이다. 소경에겐 아름다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귀머거리에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겐 한없이 아름다운 생각과 천박한 지식으로 인해 귀가 어두워지고 생각이 어두어진다고 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는 큰 도둑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이다.

《莊子》<제물편>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저것과 이것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저쪽에서 보면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이것이 된다.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찰하면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우리의 몸, 한 곳에 붙어 있는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 만큼 간격이 있다. 그러나 차별의 배후에 있는 근거를 파고들면 모든 사물은 결국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즉, 각기 하나의 사물은 그 자체가 잠시 동안도 쉴새 없이 변화를 한다.

大明天地(대명천지) 매우 밝은 세상. 크게 밝은 하늘과 땅

大福在天(대복재천) 큰 복은 하늘에 달려있고

戴盆望天(대분망천) 머리에 동이를 이면 하늘을 볼 수 없는데 보려고 한다.(두 가지 일을 하고자 하나 할 수 없음)

大書特筆(대서특필) 특히 드러나게 큰 글자로 적어 표시함

大言壯語(대언장어) 제 주제에 당치 아니한 말을 희떱게 지껄임. 또는 그러한 말

大逆無道(대역무도) 심히 人倫에 거역하는 惡逆한 행위.

大奧大秘(대오대비) 매우 깊고 큰 비밀

대우탄금 (對 牛 彈 琴)

(對:대할 대. 牛:소 우. 彈:풍길 탄. 琴:거문고 금)

소에게 거문고 소리를 들려 주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에게 도리를 말해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므로 헛수고라는 뜻임.= 우이독경(牛耳讀經).

후한(後漢) 말기에 모융(牟融)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불교학에 밝았는데, 유학자에게 불교를 설명할 때는 불전(佛典)이 아니라 유학의 《시경》《서경》등의 경서를 인용했다. 유학자가 이를 책하자 모융이 말했다.

"너희는 불전을 읽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잘 알고 있는 경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공명의(公明儀)의 고사를 인용했다.

"노(魯)나라의 공명의라고 하는 어진 사람이 하루는 소를 향해 거문고를 켜주었다. 그런데 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풀을 먹고 있었다. 소가 못 들은 것은 아니다. 청각(淸角)이라는 고상한 곡조는 소 귀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기와 등애의 울음소리와 젖을 먹고 있는 송아지의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그러자 소는 꼬리를 흔들면서 발굽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고, 귀를 세우고 그 소리를 다소곳이 들었다. 이는 소의 마음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시경》을 인용하여 불교를 설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학자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모융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大願成就(대원성취) 큰 소원을 이룸

대의멸친 (大 義 滅 親)

(大:클 대. 義:옳을 의. 滅:멸할 멸. 親:친할(육친) 친)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뜻으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돌보지 않는다는 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원년(元年:B.C.719)의 일이다. 위(衛)나라에서는 공자(公子) 주우(州 )가 환공(桓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후의 자리에 올랐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 형제간으로서 둘다 후궁의 소생이었다.

선군(先君) 장공(莊公) 때부터 충의지사로 이름난 대부 석작(石 )은 일찍이 주우에게 역심(逆心)이 있음을 알고 아들인 석후(石厚)에게 주우와 절교하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의 시대가 되자 은퇴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석작이 우려했던 주우의 반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반역은 일단 성공했으나 백성과 귀족들로부터의 반응이 좋지 않자 석후는 아버지 석작에게 그에 대한 해결책을 물었다. 석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왕실을 예방하여 천자(天子)를 배알하고 승인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천자를 배알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왕실과 각별한 사이인 진(陳)나라 진공(陳公)을 통해서 청원하도록 해라. 그러면 진공께서 선처해 주실 것이다."

이리하여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진공에게 밀사를 보내어 이렇게 고하도록 일렀다.

"바라옵건대, 주군(主君)을 시해한 주우와 석후를 잡아 죽여 대의를 바로잡아 주시 오소서."

진나라에서는 그들 두 사람을 잡아 가둔 다음 위나라에서 파견한 입회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했다고 한다.

대의명분 大義名分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절의 와 분수. 방침으로서 표면상 내건 목적이나 이유.

大慈大悲(대자대비) 넓고 커서 가없는 자비. 부처의 광대무변한 자비. (慈悲는 불쌍히 여김.)

대장부 大丈夫 군주에게 비굴하지 않고 仁義의 도를 실천하며 어떤 유혹이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貧賤해도 마음이 변치 않고 부동심의 소유자가 大丈夫라 했다.

大材小用(대재소용) 큰 材木이 작게 쓰이고 있다.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 제 능력을 다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됨

戴天之讐(대천지수) 함께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원수. 임금이나 어버이에 대한 원수는 하늘을 함께 하고 살지 않음

德無常師(덕무상사) 德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

德本財末(덕본재말) 사람이 살아가는 데 德이 뿌리가 되고 財物은 사소한 부분이다.

덕불고필유린 德不孤必有隣 덕을 쌓는 사람은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

도견상부 (道 見 桑 婦)

(道:길 도. 見:볼 견. 桑:뽕나무 상. 婦:지어미 부)

길에서 뽕나무를 보고 여자와 말을 한다는 뜻으로, 일시적인 이익을 구하려다가 결국에는 기존에 갖고 있던 것까지 모두 잃게 됨을 비유함.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은 나라 밖으로 나가 제후들을 모아 위(魏)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때 공자 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웃었다. 문공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웃는 것이오?"

서가 말했다.

"신이 웃는 것은 이웃 사람중에 그 아내가 사가로 가는 것을 배웅하는 자가 있었는데, 길에서 뽕나무를 잡고 어떤 여자를 보고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자신의 아내를 돌아보니 그 아내 역시 손짓하여 부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신은 이 남자의 일을 생각하고 웃은 것입니다."

문공은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 위나라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멈추고 돌아왔다. 문공이 미처 돌아오지 못했을 때 진나라의 북쪽을 침략하는 자가 있었다

도광양회(韜 光 養 晦)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른다. 劉備가 曹操의 식객일 때 조조를 기만하기 위해 썼던 술책

도로무공 徒勞無功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람이나 이익이 없음

도로무익 徒勞無益 애만 쓰고 이로움이 없음

도룡지기 (屠 龍 之 技)

(屠:죽일 도. 龍:용 룡. 之:어조사 지. 技:재주 기)

용을 죽이는 재능이라는 말로, 세상에서 쓸모 없는 재주를 뜻함.

《莊子》<열어구(列禦寇)>는 인위(人爲)적인 지(知)를 떠나 무위 자연의 신지를 터득하는 것에 관한 내용으로 모두 10편의 독립된 단장으로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장자는 천지만물의 근원인 도는 인격적인 것으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지식을 떠나 도 그 자체에 몰입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장자는 지인과 소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말하지 않음은 하늘을 좇는 것이고, 알면서 말하는 것은 인위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옛날의 지인(至人)들은 하늘을 좇고 인위로 가지 않았다. 전국시대 주평만(朱萍漫)이라는 자는 용(龍)을 죽이는 방법을 지리익(支離益)에게서 배우느라 천금이나 되는 가산을 탕진하여 삼 년 만에 그 재주를 이어받았지만, 그 재주를 쓸 데가 없었다. 성인은 필연적인 일에 임할 때에도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감정의 다툼이 없다. 그러나 범속한 사람들은 필연적인 일이 아닌데도 필연적인 것으로 여기고 행동하므로 마음 속에 감정의 다툼이 많고 그런 다툼을 그대로 행하니까 밖에서 찾는 데가 있게 된다. 마음속의 다툼을 믿고 행동하면 파멸로 이르게 마련이다."

여기서 주평만이라는 자가 천금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용을 죽이는 방법을 배웠지만 그 어느 곳에도 쓸 데가 없었다는 것은 소인(小人)은 세속적인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어 대도(大道)를 달관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리불언 하자성혜 (桃 李 不 言 下 自 成 蹊)

(복숭아 도, 오얏 리, 아니 불, 말씀 언, 아래 하, 스스로 자, 이룰 성, 좁은길 혜)

도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있어 사람들이 모이므로 저절로 길이 생김. 덕 있는 자는 잠자코 있어도 그 덕을 사모하여 사람들이 따른다.

전한(前漢)의 장군 이광(李廣)은 농서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예, 특히 활쏘기에 뛰어나 기원전 166년에 흉노가 침입해 왔을 때 그 격퇴에 힘썼다. 그 후로 자주 전공을 세워 북쪽 변경이 태수가 되었다. 흉노는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이 장군의 이름만 들어도 감히 침공해 오지 못했다. 그의 용병은 알기 쉬웠으며, 부하를 사랑하였으므로 모두가 기꺼이 그의 지휘에 따랐다. 행군 중 물이나 풀이 있으면 부대를 쉬게 하고, 소수의 정찰병을 보낼 뿐이었다.

기원전 121년, 4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전했을 때 4만의 흉노군에게 포위당했다. 그는 부하에게 명하여 원형의 진을 만들게 하고 자기도 강궁을 가지고 적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이 떨어져 가므로 부하들은 당황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적의 부장을 쏘아 쓰러뜨렸기 때문에 흉노는 두려워서 근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진영을 굳게 지켜 원군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선전했으나 부하를 많이 잃어 후(候)에 봉해지지 않았다. 뒤에 대장군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이 출진할 때 종군할 것을 원했으나 무제(武帝)는 그의 노령을 염려했다.

그러나 재삼 요청하므로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이광을 위청의 한 부장(部將)으로 임명했다. 위청은 명령대로 그를 우장군으로 종군케하고, 동쪽 길을 가게 하여 막북(漠北)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광은 도중에 길을 잃는 등 애로가 많아 기한 안에 당도하지 못했다. 흉노에게 애먹고 있던 위청은 이광을 의심하고, 무제에게 그를 벌하라고 상주했다. 그는 모든 죄는 자기에게 있다며 부하를 감싸고 병사로 돌아와 '60이 넘어 심판을 받는 치욕은 견딜 수 없다"며 자결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장병은 물론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桃李不言 下自成蹊" 라고 그를 절찬했다.

倒履相迎(도리상영) 신을 거꾸로 신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道謀是用(도모시용) 집을 짓는 데 길가는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으면 모두 달라 집을 지을 수 없다

도문대작(屠門大嚼)

屠 : 잡을 도 / 門 : 문 문 / 大 : 큰 대 / 嚼 : 씹을 작

【뜻】도살장 문 앞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씹는 흉내를 낸다. → 실제 고기를 먹지 않아도 그것으로 기분이 만족하다. / 좋아하는 것을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상상만 해도 유쾌하다.

【출전】조식(曹植) :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 / 환담(桓譚) : <신론(新論)>

『이 성어는 조식(曹植)의 <여오계중서(與吳季重書)>에서 ‘좌고우면(左顧右眄)’ 다음에 나온다.

“식(植)이 아룁니다. 계중(季重) 족하는 전날 관리로 등용되어 능히 나와 가깝게 자리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여러 날 잔치 자리에서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는 일이 드물어져 오히려 쌓인 노고를 다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술잔을 올리면 앞에서 물결이 넘실거리고, 퉁소와 피리가 뒤에서는 흥겹게 연주된다면 족하는 그 풍채를 독수리처럼 드날려서 봉황이 탄복하고 호랑이가 응시할 것이니, 한(漢) 고조(高祖)의 명신인 소하(蕭何)나 조참(曹參)도 그대의 짝이 될 수 없고, 한 무제(武帝)의 명장인 위청(衛靑)과 곽거병도 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살펴보아도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고 하실 것이니, 어찌 당신의 장한 뜻이 아니겠습니까(左顧右眄,謂若無人,豈非吾子壯志哉). 도살장 문 앞을 지나가면서 크게 입맛을 다시니, 비록 고기를 못 먹었지만 귀하고 통쾌하다.(過屠門而大嚼雖不得肉 貴且快意)”

또한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장안의 음악을 들으면 문밖을 나서 서쪽을 보며 웃고, 고기의 맛이 좋다는 말을 듣고 나면 도살장 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다.”(人聞長安樂 則出門西向而笑 肉味美 對屠門而嚼)』

도미 掉尾 꼬리를 흔듦. 끝판에 더욱 세차게 활동함.

도방고리(道傍苦李)

(道:길 도. 傍:곁 방. 苦:쓸 고. 李:오얏 리)

길가의 쓰디 쓴 자두라는 말로 아무도 따는 사람이 없이 버림받음

진(晉)나라의 왕융(王戎)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다.

그때 길가의 오얏나무에 가지가 휘어지게 많은 열매가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그것을 따려고 앞을 다투어 달려갔다. 그런데 왕융 혼자만은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다.

"왜 너는 따러 가지 않느냐?"

"길가에 있는데, 저렇게 열매가 많이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이 써서 먹지 못할 자두임이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따보니 과연 왕융이 말한 대로 먹을 수 없는 자두였다.

[주]왕융:234~305년. 진(晉)의 정치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으로 노장 사상을 선호하고 유유자적하며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도불습유 (道 不 拾 遺)

(道:길 도. 不:아니 불. 拾:주을 습. 遺:잃을 유)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지 않는다. 나라가 잘 다스려져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을 함부로 줍지 않음

秦(진)은 일찍부터 法家(법가)를 등용해 부국강병을 이룬 나라다. 孝公(효공)이 상앙을 등용해 두 번에 걸쳐 變法(변법)을 실시하자 秦은 반석위레 서게 됐다. 상앙이 사용했던 방법은 간단했다. 가혹하리만큼 엄한 벌을 세워 백성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왕족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과연 그가 헌법의 초안을 올리자 孝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대로 했다가는 한 사람도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법이 공포되자 아우성이었다. 혹자는 칭찬하고, 혹자는 비난했다. 상앙은 둘 다 잡아다 엄벌에 처했다. 이때부터 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렇게 해놓고 法을 시행하자 백성들은 손가락 하나로 움직였으며, 백성중 감히 法을 어기는 者는 아무도 없었다.

法을 시행한지 10년,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집집마다 넉넉했고 전쟁에 용감했으며 나라는 크게 흥성했다. 당시의 사회상황況을 사마천은 [史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으며(道不拾遺), 산에는 도적이 사라졌다(山無盜賊)." 後에 秦始皇은 이를 바탕으로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 道不拾遺는 철저한 준법정신을 뜻하기도 한다.

도비순설 (徒 費 脣 舌) 헛되이 입술과 혀만 수고롭게 한다.

盜亦有道(도역유도) 도둑들에게도 나름대로의 도덕이 있다

도외시(度外視)

(度:법도 도. 外:바깥 외. 視:볼 시)

① 가욋것으로 봄. 안중에 두지 않고 무시함. ② 문제 삼지 않음. 불문에 붙임.

후한의 시조 광무제(光武帝)때의 일이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한(漢:前漢)나라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현(劉玄)을 세워 황제로 삼고 한나라를 재흥했다.

대사마(大司馬)가 된 유수는 그 후 동마(銅馬) 적미(赤眉) 등의 반란군을 무찌르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으나 천하 통일에의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이윽고 제(齊) 땅과 강회(江淮) 땅이 평정되자 중원(中原)은 거의 광무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벽지인 진(秦) 땅에 웅거하는 외효( )와 역시 산간오지인 촉(蜀) 땅의 성도(成都)에 거점을 둔 공손술(公孫述)만은 항복해 오지 않았다.

중신들은 계속 이 두 반군의 토벌을 진언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이렇게 말하며 듣지 않았다.

"이미 중원은 평정(平定)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문제시할 것 없소[度外視]."

광무제는 그간 함께 많은 고생을 한 병사들을 하루 속히 고향으로 돌려보내어 쉬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도원결의 (桃 園 結 義)

(桃:복숭아 도, 園:동산 원, 結:맺을 결, 義:옳을 의)

복숭아나무 정원에서 의형제 맺음

소설 [삼국지연의] 앞대목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를 맺은 것을 말한다. 의리로 맺어져 죽음을 맹세하는 경우에 흔히 인용되는 문구다.

후한(後漢) 후기에 들어서면서 외척과 환관들의 발호로 정치는 문란하고 사회는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많은 백성이 태평도(太平道)의 교조 장각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황건적이 되어 한왕실을 위협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의용군을 모집한다는 방(榜)을 각지에 써붙였다. 어느날 유비도 이 방을 읽어보고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가 우연히 그 자리에서 장비를 만나 서로 동지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두 사람은 주막으로 자리를 옮겨 세상 돌아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가 우연히 주막에 들른 관우와 합석하게 되었다.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세 사람은 완전히 의기가 투합, 마침내 유비의 집 복숭아밭에서 의형제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이렇게 맹세했다.

"우리 셋은 성은 다르지만 의형제를 맺기로 했다. 마음을 합치고 힘을 모아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백성을 편안케 하겠노라. 태어난 때는 모두 다르지만 같은 날에 죽고자 맹세한다."

그러나 복숭아밭에서 의를 맺는 대목은 소설에 보일 뿐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무튼 이들이 세운 촉(蜀)은 조조의 위(魏)와 손권의 오(吳)와 함께 삼국시대를 이룬다.

도이후착불이전착 盜以後捉不以前捉 도둑은 뒤로 잡아야지 앞으로 잡지 않는다.

刀折矢盡(도절시진)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바닥났다는 뜻으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음의 비유.

도주지부(陶 朱 之 富)

(陶:질그릇 도. 朱:붉을 주. 之:어조사 지, 富:부자 부)

도주공(陶朱公)의 부(富). 막대한 재산. 큰 부자

춘추시대 越王(월왕) 勾踐(구천)은 참모 범려가 간하는 것을 듣지 않고 吳(오)나라에 선제 공격을 했다가 대패하여 회계산으로 도망갔다. 구천은 범려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그에게 조언을 구했다. 구천은 범려의 권고대로 오나라에 항복하고 뒷날을 기약하며 쓰디쓴 쓸개를 맛보면서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상장군이 된 범려는 구천의 인품이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가족을 이끌고 齊(제)나라로 탈출했다. 제나라에서는 이름을 '치이자피'로 바꾸고 장사를 하여 엄청난 돈을 손에 쥐게 되었다.

제나라는 범려의 비상한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재상이 되어달라고 했지만 "천금의 부를 누리고 재상까지 된다는 것은 영화의 극치다. 게다가 명성까지 누리는 건 좋지 않다"면서 제나라의 제의를 사양하고 수만금의 재산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陶(도)땅으로 이사했다. 이름을 다시 朱(주)로 바꾸고 여기서도 장사를 시작해서 또 한번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陶朱公이라고 불렀다.

그가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은 것은 철저한 商術(상술)로 이익을 도모했지만 사람들을 쥐어짜는 일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이번에도 번 돈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뒷날 도주공의 자식들도 父傳子傳(부전자전)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소금과 목축사업으로 巨富(거부)를 이룬 魯(노)나라의 倚頓(의돈)이란 사람도 諸候(제후)들 보다 풍요로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막대한 재산 또는 거부를 陶朱倚頓之富라고도 한다.

途中曳尾(도중예미) 거북이 진흙에서 꼬리를 끌며 오래 산다(선비가 벼슬하지 않고 고향에서 가난하게 지냄).

盜憎主人(도증주인) 도둑은 주인이 밉게 마련이다. 즉 자기와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미워지는 것

到處狼狽(도처낭패) 하는 일마다 다 실패함

到處春風(도처춘풍) 이르는 곳마다 봄바람. 즉 좋은 얼굴로 남을 대하여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려고 처신하는 사람.

도천지수(盜 泉 之 水)

(盜:도둑 도, 泉:샘 천, 之:어조사 지, 水:물 수)

아무리 목이 말라도 도둑 도字가 들어있는 이름의 샘물은 마시지 않는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결코 부정한 짓은 할 수 없다는 뜻

渴不飮盜泉水(갈불음도천수)의 줄임말

'문선'이라는 책에는 晋(진)나라의 육기(陸機)가 지은 맹호행(猛虎行)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渴不飮盜泉水는 그 冒頭(모두)에 나온다.

아무리 목 말라도 도천의 물은 마시지 않고(渴不飮盜泉水)

아무리 더워도 악나무 그늘에서는 쉬지 않노라(烈不息惡木陰)

나쁜 나무엔들 가지가 없겠는냐마는(惡木豈無枝)

뜻있는 선비는 고심이 많구나(志士多苦心)

盜泉은 지금도 山東省(산동성) 泗水(사수)현에 있는데 설원(說苑)이란 책에도 이런 얘기가 있다.공자가 어느날 목이 몹시 말랐으나 그 샘물을 떠먹지 않았고 또 勝母(승모)라는 마을에는 날이 저물어 도착했지만 머물지 않고 곧장 떠났다. 勝母란 자식이 어머니를 이긴다는 뜻이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마을에서는 하룻밤도 자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또 晋나라 吳隱之(오은지)가 지은 貪泉(탐천)이라는 시에 나오는 '탐천'은 廣州(광주)에 있는데 그 샘물도 뜻있는 사람들은 마시면 욕심쟁이가 된다고 안마신다.

이런 사례는 끝까지 청절을 지키려다 수양산에 숨어 고비를 뜯어먹고 採薇歌(채미가)를 부르며 목숨을 부지하다 굶어죽은 伯夷(백이) 叔齊(숙제)의 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백이 숙제도

수양산 바라보며 夷齊(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採薇(채미)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엣 것인들 그 뉘따에 낫더니

라고 읊은 우리 성삼문을 당하지 못한다.

도청도설( 塗 聽 塗 說 )

(道:길 도. 聽:들을 청. 塗:길 도. 說:말씀 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한다는 뜻. 곧 ① 설들은 말을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옮김. ②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뜬소문.

①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논어(論語)》〈양화편(陽貨篇)〉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 것[道聽塗說]'은 덕을 버리는 것과 같다[德之棄也]."

길거리에서 들은 좋은 말[道聽]을 마음에 간직하여 자기 수양의 양식으로 삼지 않고 길거리에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말해 버리는 것[塗說]은 스스로 덕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말은 마음에 간직하고 자기 것으로 하지 않으면 덕을 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고, 천도(天道)를 지상(地上)에서 행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공자는,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스스로 억제하고 인덕(仁德)을 쌓으며 실천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쌓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논어》에서 이르고 있다.

② 후한시대, 반고(班固)가 엮은《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대체로 소설이란 것의 기원은 임금이 하층민의 풍속을 알기 위해 하급 관리에게 명하여 서술토록 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세상 이야기라든가 길거리의 뜬소문은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는[道聽塗說]' 무리가 지어낸 것이다."

소설이란 말은 이런 의미에서 원래는 '패관(稗官:하급 관리) 소설'이라고 일컬었으나 나중에 그냥 '소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③《순자(荀子)》〈권학편(權學篇)〉에는 다언(多言)을 이렇게 훈계하고 있다.

"'소인배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 곧바로 입으로 흘러나오고[口耳之學]'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귀와 입 사이는 불과 네 치[口耳四寸].' 이처럼 짧은 거리를 지날 뿐이라면 어찌 일곱 자[七尺] 몸을 훌륭하게 닦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학문을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닦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배운 것을 금방 다른 사람에게 고하고 자기를 위해 마음 속에 새겨 두려고 하지 않는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하지만 소인배의 학문은 인간을 못쓰게 망쳐 버린다. 그래서 묻지 않은 말도 입밖에 낸다. 이것을 '잔소리'라 하며, 하나를 묻는데 둘을 말하는 것을 '수다[饒舌]'라고 한다. 둘 다 잘못되어 있다. 참된 군자(君子)는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다."

어느 세상에도 오른쪽 귀로 들은 것을 왼쪽 사람에게 털어놓는 수다쟁이 정보통이 많다. 더구나 그 정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에 점점 꼬리를 끌게 마련이다. '이런 무리는 해가 있을 뿐'이라며 공자, 순자는 경계하고 있다.

도탄 塗炭 생활형편이 몹시 곤란하고 고통스러운 지경

도탄지고 (塗 炭 之 苦)

( 塗:진흙 도. 炭:숯 탄. 之:어조사 지. 苦:괴로울 고)

진흙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고통. 곧 백성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

하(夏)의 걸왕(桀王)과 은(殷)의 주왕(紂王)은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은 망국(亡國)의 제왕(帝王)으로서 흔히 '걸주(桀紂)'로도 불린다. 이 桀王의 학정에 분연히 일어나 桀王의 대군을 명조산(鳴條山)에서 대파하고 天子가 된 사람이 殷의 탕왕(湯王)이다. 湯王이 병졸을 거느려 출전하기에 앞서 출전의 서약을 선포하였다.

"오너라. 너희 무리여, 모두 내말을 듣거라. 내가 감히 亂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夏王의 죄가 많아 하늘이 명하사 이를 내쫓으심이니라."

싸움에 대승하여 개선함에 이르러 湯王은 다시, "夏王이 덕을 멸하고 포악한 정치로 인하여 백성에게 원성을 야기(惹起)했다. 만백성이 그 해를 입어 씀바귀의 독을 참지 못하여 허물 없음을 천지신명께 告하니, 천도(天道)는 善을 축복하옵고, 음(淫)에 재앙을 내리시니 夏에 재앙을 내리시사 그 죄를 밝히나이다." 하고 桀王의 죄를 탄핵하였다.

桀王의 학정에 대해서는 [書經]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夏가 德에 어두워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지거늘 하늘이 湯王에게 용지(勇智)를 주시고 온 나라에 표정(表正)하시어 우(禹)의 옛 땅을 잇게 하시니 이제 그 가르침에 따라 천명을 좆으실지이다." 그 표현에서 보듯 塗炭은 왕의 학정에 따른 백성의 궁핍한 생활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道學先生(도학선생) 도덕의 이론만 캐고 실사회의 일에 어두운 사람을 조롱하는 말

倒行逆施(도행역시)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함. 곧 道理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

독보 獨步 재능이 출중하여 혼자 뛰어나다. 사계(斯界)의 귄위자란 뜻.

독불장군(獨 不 將 軍) : 혼자서는 어떤 일을 도모할 수 없다.

독서망양(讀 書 亡 羊)

(讀:읽을 독. 書:책 서. 亡:잃을 망. 羊:양 양)

책을 읽는 바람에 양을 잃어버림. 어떤 일에 정신을 빼앗겨 중요한 것을 잃어버림.

장(臧)은 하인이며 곡(穀)은 하녀다. 그 둘이 한집에 살면서 양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둘은 똑같이 양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양을 잃어버린 연유를 묻자 둘은 해명했다.

먼저 장이 말했다.

"사실을 말씀 드리자면, 제가 들고 있는 이 대나무에 씌여 있는 글을 읽고 있었는데 그만 양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이번에는 곡이 말했다.

"저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 보니 양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둘의 경우는 서로 하는 일은 달랐지만 양을 놓쳐 버린 것은 같다고 지적했다. 이를테면 책을 읽거나 또는 주사위 놀이를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정신을 빼앗긴 결과다. 이것은 마음이 밖에 있어 도리를 빼앗긴 결과다.

독서백편의자현 讀書百遍意自見 책을 여러 번 되풀이하여 읽으면 뜻은 저절로 알게 됨.

독서삼도 讀書三到 독서의 법은 구도(口到), 안도(眼到), 심도 (心到)에 있다. 독서하는데 눈으로 보고,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 깨우쳐야 한다.

독서삼매 讀書三昧 오직 책읽기에만 골몰하다.

독서상우 讀書尙友 책을 읽음으로써 옛날의 현인들과 벗이 될 수 있다.

讀書種子(독서종자) 독서를 좋아하는 자손을 일컫는 말.

獨守空房(독수공방) 부부가 서로 사별이나, 별거하여 여자가 남편 없이 혼자 지내는 것을 말함.

독숙공방 獨宿空房 빈방에 혼자 자는 것. 부부가 한 곳에서 거처하지 아니하는 것. 배우자가 없는 것.

독안룡 (獨 眼 龍)

(獨:홀로 독. 眼:눈 안. 龍:용 룡)

애꾸눈의 용이란 뜻. 곧 ① 사납고 용맹한 장수. ② 애꾸눈의 고덕(高德)한 사람.

당나라 18대 황제인 희종(僖宗:873∼883)때의 일이다. 산동(山東) 출신인 황소(黃巢)는 왕선지(王仙芝) 등과 반란을 일으킨지 5년만에 10여 만의 농민군을 이끌고 마침내 도읍인 장안에 입성했다. 그리고 스스로 제제(齊帝)라 일컫고 대제국(大齊國)을 세웠다.

한편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한 희종은 돌궐족(突厥族) 출신인 맹장 이극용(李克用:856∼908)을 기용하여 황소 토벌을 명했다. 당시 4만 여에 이르는 이극용의 군사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사정없이 맹공을 가했기 때문에 반란군은 '갈가마귀의 군사[鴉軍]가 왔다 !'며 심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19대 황제인 소종(昭宗:883∼903)이 즉위한 그 이듬해 마침내 반란군은 토멸되었고 황소도 패사(敗死)하고 말았다. 이극용은 그 공에 의해서 농서[ 西:감숙성(甘肅省)] 군왕(郡王)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극용은 숙적 주전충[朱全忠:852∼912,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귀순한 뒤 황소 토멸에 공을 세워 동평군왕(東平郡王)이 됨]과 정권을 다투다가 패하고 실의 속에 세상을 떠났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주전충은 20대 황제인 애종(哀宗:903∼907)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량(後梁:907∼923)을 세웠으나 16년 후 이극용의 아들 이존욱[李存 :후당(後唐)의 초대 황제인 장종(莊宗)]에게 멸망했다.

맹장 이극용에 대해《오대사(五代史)》〈당기(唐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극용은 젊고 효용(驍勇:사납고 날쌤)했는데 군중(軍中)에서는 이아아(李鴉兒)라고 일컬었다. 그의 눈은 애꾸눈이었다. 그가 귀한 자리에 오르자 일컬어 '독안룡'이라고 했다."

독야청청( 獨 也 靑 靑 )

[홀로 독/ 어조사 야/ 푸를 청/ 푸를 청] : 홀로 푸르름. 혼탁(混 濁 )한 세상에서 홀로 높은 절개(節 槪 )를 드러내고 있음을 말함.

獨陽不生(독양불생) 홀로서는 아이를 날 수 없듯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뜻.

獨掌不鳴(독장불명) 한 손바닥으로는 소리가 나지 않는 않음. 혼자서는 일하기도 어렵고 둘이 협력하여야 함

督責之術(독책지술) 조정에서 백성들을 구박하여 심하게 부리는 술책.

독청독성 獨淸獨醒 어지러운 세상 술 취한 무리 속에서 홀로 깨끗하고 정신이 맑음을 이르는 말.

독학고루 獨學孤陋 독학자는 견문이 좁고 학문의 정도에 들기 힘든다.

獨行踽踽(독행우우) 세상 사람에게 구애됨이 없이 홀로 자기의 뜻을 행함.

頓首再拜(돈수재배) 머리가 땅에 닿도록 두 번 절함.

豚蹄盂酒(돈제우주) 돼지발톱과 술 한 잔이라는 뜻으로 변변치 못한 음식 또는 물건.

돈제일주 (豚 蹄 一 酒)

(豚:돼지 돈. 蹄:발굽 제. 一:한 일. 酒:술 주)

돼지 발굽과 술 한 잔이라는 말로, 작은 물건으로 많은 물건을 구하려고 하는 것을 비유함.

위왕 8년, 초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침입하였다. 위왕은 순우곤을 시켜 조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게 하였는데, 황금 백 근과 거마 열 대를 예물로 가지고 가게 되었다. 순우곤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웃자, 관의 끈이 모두 떨어졌다. 왕이 말하였다.

"선생은 이것을 적다고 생각하시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웃는 데에 어찌 까닭이 있지 않겠소?"

"어제 신이 동쪽에서 오던 중에 길가에서 풍작을 비는 자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돼지 발 하나와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빌기를, '높은 밭에서는 그릇에 가득, 낮은 밭에서는 수레에 가득, 오곡이여 풍성하게 우리 집에 넘쳐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손에 든 것은 그처럼 작으면서 원하는 바가 사치스러운 것을 보았기 때문에 웃는 것입니다."

이에 위왕은 황금 천 일(鎰), 백벽(白璧) 열 쌍, 거마 백 대를 예물로 늘려 주었다. 순우곤이 이것을 가지고 조나라에 도착하자, 조나라 왕은 정예병사 10만명과 혁거 천 승을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초나라는 그 밤으로 군대를 철수하고 말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을 최대한도로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당하는 투자가 요구된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조금도 투자하지 않고 많은 것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豚柵鷄栖(돈책계서) 돼지우리와 닭의 홰. 즉 촌락의 풍경을 이름.

咄咄怪事(돌돌괴사) 놀랍고 괴상한 일.

咄咄逼人(돌돌핍인) 돌돌은 놀라서 이상히 여기는 소리 또는 모양. 기예 등이 뛰어난 것을 보고 경탄함을 이름.

돌불연불생연 突不燃不生煙 불을 때지 않으면 굴뚝에서 연기가 날 까닭 이 없다. 어떤 소문이 날때는 반드시 그런 소문이 날 만한 원인이 있다.

동가숙서가식 東家食西家宿 먹을 것과 갈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것을 이름.

東家之丘(동가지구) 남의 진가를 알지 못함, 사람 보는 눈이 없음.

동가홍상 同價紅裳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란 뜻이다. 이왕이면 곱고 아름답고 젊은것이 좋다는 말이다.

동고동락 同苦同樂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함.

동공이곡 (同 工 異 曲)

(同:같을 동. 工:장인 공. 異:다를 이. 曲:가락 곡)

시문을 짓는 기교는 똑같으나 그 곡조(취향)는 다르다. 겉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당나라 대문장가 韓愈(한유)의 '進學解(진학해)'에 있는 말이다.

이 글은 선생과 학생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한유의 自問自答(자문자답). 내용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훈계한다.

"설령 세상에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관직의 불공평을 말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자신의 학업 닦지 못한 것을 반성하여 책망하고 한층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자세인 것이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선생님은 모든 학문을 닦으시고 옛날의 대문장가 못지않은 글을 지으시고 인격에 있어서도 전혀 나무랄 데가 없으신데도 사람들의 신임을 못 받으시고 친구분들의 도움도 없고 자칫하면 죄까지 뒤집어 쓸 형편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저희들에게 처세의 도리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공자나 맹자도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불행한 생애를 보냈다. 나는 이분들 같은 大聖人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벼슬해 녹봉 받아 처자 부양하며 편히 살고 있잖느냐.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헐뜯음을 당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고 지금의 형편도 과분하지."

'진학해'에는 또 학생이 선생(한유)의 문장을 칭찬하는 대목도 있다.

"莊子(장자) 屈原(굴원) 司馬遷(사마천) 楊雲(양운) 司馬相如(사마상여)의 문장이 '다같이 교묘하지만 취향은 달리한다(同工異曲)' 선생의 글도 그와 같다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同工異曲이 당초와는 달리 겉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다는 의미로 경멸의 뜻을 담아 쓰이고 있다.

同歸殊塗(동귀수도) 천하의 이치는 귀착이 같으나 도에 따라 다를 수 있음.

同根連枝(동근연지) 같은 뿌리와 잇닿은 나뭇가지. 즉, 兄弟姉妹를 일컫는 말이다.

同氣相求(동기상구) 기풍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서로 동류를 찾아 모인다.

同氣一身(동기일신) 형제자매는 한 몸과 같음

童男童女(동남동녀)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洞洞燭燭(동동촉촉) 매우 공경하고 삼가 조심스러운 모양.

동량지기 棟梁之器 중임(重任)을 맡을 만한 기량(器量).

동량지재 棟梁之材 마룻대와 들보가 되는 재목이란 뜻으로, 중임(重任)을 맡을 만한 인재(人材)

동명상조 同明相照 대개 서로 비슷한 무리들이 서로 한데 어울린다.

同文同軌(동문동궤) 천하를 통일하는 것을 뜻함. 同文은 문자를 통일하게 하는 것이고, 同軌는 법을 같게 하는 것

동문서답(東 問 西 答)

[동녁 동/ 물을 문/석녁 서/ 답 답] : 동쪽 물음에 서쪽 답을 함. 곧, 묻는 말에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을 함.

동문수학(同 門 修 學) 같은 스승 밑에서 같이 학문을 닦고 배움.

동 방(洞房)

(洞:동굴 동. 房:방 방)

신혼 부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방

아방궁(阿房宮)의 美女 삼고낭(三姑娘)은 진시황(秦始皇)의 폭정과 음일(淫逸)을 참지 못해 화산(華山)으로 도망쳤다. 그전 분서갱유(焚書坑儒)때 심박(沈博)이라는 서생도 참변을 피해 華山에 숨어 들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나 나뭇가지를 향으로, 천지신명을 주례로 혼례를 올렸다.

그러나 산속이라 첫날 밤을 보낼 신방(新房)이 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은 바위 아래에 있는 동굴(洞)을 신방(房)으로 삼아 첫날 밤을 보냈다. 이리하여 '洞房'은 '동굴(洞窟)의 房'으로 신방을 뜻하게 되었다. 지금은 신혼 부부가 사는 집을 뜻하지만 본디는 첫날 밤을 보내는 房으로 신부측 집의 房이다.

新房에는 화촉(華燭)을 밝혀 놓는데(華燭洞房), 신랑이 먼저 들어가 신부를 기다린다. 新郞은 이미 사모관대(紗帽冠帶)를 벗고, 新婦측이 마련한 두루마기로 바꿔 입는데 이것을 '관대벗김'이라고 한다. 新婦가 들어오면 간단히 술을 나눈 다음 新婦의 족두리와 예복을 벗긴다. 이때 친지들은 新房의 창호지를 뚫어 엿보는데, 그것을 '新房지킨다', 또는 '新房 엿보기'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촛불이 꺼지면 물러나게 되는데 촛불은 반드시 新郞이, 그것도 옷깃으로 꺼야 한다. 입으로 불어 끄면 不吉하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新房에서 첫날 밤을 보내면 아침에 新房에 잣죽이나 떡국이나 올렸다.

이상은 전통 혼례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이고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식이 끝나기 무섭게 신혼 여행길에 오르니 엄밀히 말해 지금의 新房은 호텔 방인 셈이다.

동방화촉(洞 房 華 燭) 혼례를 치른 뒤에 신랑이 신부 방에서 자는 일.

동병상련(同 病 相 憐)

(同:한가지 동. 病:앓을 병. 相:서로 상. 憐:불쌍히 여길 련)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딱하게 여겨 동정하고 돕는다는 말.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吳)나라의 공자 광(光)은 사촌 동생인 오왕 요(僚)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 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광(합려)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 동우상구(同憂相救)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越)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주] 오자서 : 춘추 시대의 초(楚)나라 사람. 이름은 원(員).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아버지 오사(吳奢)와 형 오상(伍尙)이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처형당하자 오나라로 망명함. 9년 후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의 도읍 영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300대나 매질하고 나서야 원한을 풀었다고 함.

동분서주 東奔西走 동서로 몹시 분주함. 곧,이곳 저곳 아주 바쁘게 돌아다님

동빙한설(凍 氷 寒 雪) 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치는 추위

동산고와(東 山 高 臥) 동산의 높은 곳에 누워 있다는 말로, 동산에 은거하며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비유한다.

동상이몽(同 床 異 夢) :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꿈. 서로 다른 꿍꿍이를 품다.

동서불변(東 西 不 辨) 동과 서를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무것도 모름

동선하로 冬扇夏爐 겨울의 부채와 여름의 화로라는 말이니 쓸데없는 물건을 말한다.

동성상응(同聲相應)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여 어울린다. 의견을 같이 하면 자연히 서로 합치게 된다는 의미.

동성이속(同性異俗) 사람의 성질은 본래는 같으나 습관에 따라 변함을 뜻함.

동식서숙 (東 食 西 宿)

(東:동녘 동. 食:먹을 식. 西:서녘 서. 宿:잘 숙)

동쪽에서 먹고 서쪽에서 잔다. 먹을 곳, 잘 곳이 없어 떠도는 삶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이라고도 한다.

齊(제)나라에 시집가야 할 나이에 이른 한 처녀가 있었다. 어느날 그 처녀의 집에 두 곳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동쪽의 집의 신랑감은 인물은 보잘 것 없으나 대단한 부자였고 서쪽 집은 매우 가난했지만 신랑감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난처하게 된 부모는 당사자의 마음이 중요하다며 딸에게 물어보았다.

"만일 동쪽 집의 총각에게 시집가고 싶으면 왼쪽 소매를 걷고 서쪽 집 총각에게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쪽 소매를 걷어라"

한참 망설이고 있던 처녀는 양쪽 소매를 다 걷어올렸다. 부모가 놀라 그 까닭을 묻자 딸은 말했다.

"낮에는 동쪽 집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고 살고 싶고 밤에는 서쪽 집에서 자고 싶어요(東家食西家宿)"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연 뒤 이를 자축하는 큰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개국공신이기도 한 어느 정승이 거나한 술김에 雪中梅(설중매)라는 아름다운 기생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수작을 걸었다.

"듣자니 너는 아침에는 동가식하고 저녁에는 서가숙한다니 오늘밤은 나하고 잠자리를 같이하면 어떻겠는냐?"

그러자 설중매는 말했다.

"좋지요. 어제는 왕씨, 오늘은 이씨를 섬기는 정승과 동가식서가숙하는 천한 기생이라 궁합이 잘 맞겠습니다."

東食西宿은 원래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절개도 없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걸 비유하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님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 있다.

동심동덕(同心同德) 일치단결된 마음을 뜻함.

동심지언 同心之言 절친한 친구사이

동악상조(同惡相助) 악인은 악을 이루기 위하여 서로 돕는다는 뜻으로 동류끼리의 도움을 이름.

동양지재(棟梁之材)

[마룻대 동 /들보 량, 양 /갈 지 / 재목 재]

기둥과 들보로 쓸 만한 재목이라는 뜻으로, 한 집안이나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를 이르는 말.

동업상구(同業相仇) 같은 업을 경영하는 사람은 서로 배척함을 이름.

동엽봉제(桐葉封弟) 장난삼아 오동나무 잎으로 동생을 諸侯에 封한다는 뜻으로, 제후를 봉하는 일을 말함.

동온하청(冬溫夏淸) 부모를 섬김에 있어,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린다는 뜻.

동우각마(童牛角馬) 뿔이 없는 송아지와 뿔이 있는 말이라는 뜻으로 도리에 어긋남을 비유한말

동이불화(同而不和) 겉으로는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내심은 그렇지 않음.

동절최붕(棟折催崩) 대들보가 무너지면 서까래도 무너지듯이 상하관계에서 윗사람이 망하면 아랫사람도 온전치 못하다

동정서벌 東征西伐 전쟁을 하여 여러 나라를 이곳 저곳 정벌(征伐)함

동족방뇨 凍足放尿 언 발에 오줌을 누어서 녹인다 함이니 일시 구급은 되나 곧 그 효력이 없어질 뿐 아니라 더 악화된다.

동주상구 同舟相救 서로 알거나 모르거나 미워하거나 아니거나 위급한 경우를 함께 동주제강(同舟濟江) 원수끼리도 한 가지 일을 위해서는 같은 배를 타고 서로 구한다(=吳越同舟).

동추서대 東推西貸 여러 곳에서 돈을 빌려쓰다.

동 취(銅臭)

(銅:구리 동. 臭:냄새 취)

동전의 악취라는 뜻. 돈으로 관직을 산 사람을 비웃을 때 쓰는 말.

후한(後漢) 말기, 영제(靈帝) 시대에 이르러 차츰 왕조 말기 증상이 병적으로 나타났다. 태평도(太平道)라는 사교가 일어나 수십 만의 신도를 거느리게 되어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권세를 휘둘러 사복을 채우고, 마침내는 국고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관직을 파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값은 관직이 고하에 따라 달라 지방 장관은 2천만, 그 밑의 관직은 5백만이라는 풍문이 자자했다.

당시 최열이라는 사람이 5백만의 돈을 써서 사도(司徒)라는 관직을 샀다. 그는 아무래도 항간이 풍문이 마음에 걸려 자기 아들 균에게 물었다.

"세간에서는 나의 이번 임관을 어떻게 말하더냐?"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이번의 임관에는 동취(銅臭)가 많이 난다고 분분하며, 떠들썩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무사확이라는 인물은 수나라 말기의 상인이었다. 그는 태원을 근방으로 발호하던 이연 일파에게 거금을 밀어 주어 뒷날 당나라가 들어섰을 때 이주도독이라는 자리에 올랐다. 이를테면 당시 강북 지역을 감시하는 지방 장관이었던 셈이다. 그는 돈을 뿌려 빠른 속도로 고관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늘 생각했다. 조용히 눌러 있으면 문벌 귀족들이 제자리를 찾는 날이 있을 것이므로 그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를 '동취(銅臭)'라고 놀렸다. 이것은 과거의 신분을 깔보는 비웃음이었다. 그는 반드시 동취를 씻어 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귀족과 혼인을 해야만 했다. 몰락한 귀족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라 본 것이다. 일단 마음이 정해지자 무사확은 조강지처를 가차없이 버리고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의 후손인 어린 양씨를 후처로 맞아들였다.

이연이 당나라를 세우자 무사확의 딸이 궁으로 들어간다. 무조(武照). '당나라 3대 후에 천하는 무씨의 손으로 들어간다'는 이순풍의 예언처럼 무조는 처음에 당태종을 모시고 나중에는 그의 아들 고종을 섬긴다. 자식을 낳고 황비(皇妃)에 자리에 올라, 훗날 중국 천하를 움켜쥐고 좌지우지하는 여황제로 등극한다. 이른바 측천무후다.

동패서상(東敗西喪) 이르는 곳마다 패망하고 실패함

동호지필(董狐之筆)

(董:동독할 동. 狐:여우 호. 之:갈 지(…의). 筆:붓 필)

'동호의 직필(直筆)'이라는 뜻. 곧 ① 정직한 기록. 기록을 맡은이가 직필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을 이름. ②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적어 역사에 남기는 일.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대신인 조천(趙穿)이 무도한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당시 재상격인 정경(正卿) 조순(趙盾)은 영공이 시해되기 며칠 전에 그의 해학을 피해 망명 길에 올랐으나 국경을 넘기 직전에 이 소식을 듣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사관(史官)인 동호(董狐)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 그 군주를 시해하다.'

조순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고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대감이 분명히 하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감은 당시 국내에 있었고, 또 도읍으로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거나 처벌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감은 공식적으로는 시해자(弑害者)가 되는 것입니다."

조순은 그것을 도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조선자(趙宣子:조순)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책임은 면했을 것이다.

두각 (頭 角)

(頭:머리 두. 角:뿔 각)

머리 끝. '두각을 나타내다(見頭角·현두각)하면 많은 사람중에서 학업이나 기예 등이 유달리 뛰어나게 나타난다는 말

見頭角은 韓愈(한유)의 柳子厚墓誌銘(유자후묘지명)에 나오는 말인데 子厚는 柳宗元(유종원)의 字. 한유와 유종원은 唐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유종원은 한유보다 다섯 살 적었지만 5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유종원은 26세 때 博學宏詞科(박학굉사과)에 합격했으나 한유는 이 시험에 세번이나 도전하고도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한유와 유종원은 서로 깊이 이해하면서 交遊(교유)했는데 古文의 부흥에도 힘쓰는 등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젊어서부터 筆名(필명)을 드날리면서 官運(관운)도 좋아 사람들의 선망을 받아온 유종원은 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지방으로 좌천되는 등 불운 끝에 47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후반부의 불행이 문장에 깊이와 무게를 더해줌으로써 그의 명문장은 그의 불행과 교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새 任地(임지)로 부임해 가는 도중에 유종원의 죽음 소식을 들은 한유는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묘지명을 지었다. 유종원의 생애를 살펴보는 대목은 이렇게 되어 있다.

"유종원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것에 통달해 있었다. 부친의 생존시에는 소년이었지만 이미 완성의 경지에 달해 있었다. 과거의 進士試(진사시)에 급제하여 '단연 출중하게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見頭角)'. 사람들은 모두 유씨 가문에 자식다운 자식이 났다고 말했다."

두견 杜鵑 옛 중국의 촉에 杜宇라는 天神이 있어 너무도 인간을 사랑하여 하계에 내려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후에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촉의 왕이 되어 望帝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洪水라는 고민거리가 생겨 궁리 끝에 鼈靈(자라의 신)을 재상에 앉히고 홍수를 다스리도록 시켰다. 과연 별령은 신통력을 발휘해 홍수를 다스렸고 망제는 왕위를 물려주고 서산에 은거했다. 그러나 왕이 된 별령은 그만 두우의 아내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두우는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마침내 지쳐 죽게 되었는데 그 때 두견새에게 말했다. '두견새야 ! 내대신 울어서 나의 심정을 사람들에게 전해다오. !' 망제의 유언을 들은 두견은 즉시 촉으로 날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를 토하면서 울어댔다. 어찌나 구성되게 울었던지 촉의 백성들은 두견새 소리만 들으면 죽은 망제를 그리워하며 더욱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두견화(杜 鵑 花)

(杜:막을 두. 鵑:두견새 견. 花;꽃 화)

진달래꽃. 죽은 망제(望帝)의 혼이 담긴 꽃

杜鵑(두견)은 일명 '자규(子規)', '접동새'라고도 한다. 구성진 울음 소리는 恨(한) 많은 우리네 민족 정서와도 잘 맞아 문학에 자주 등장한다. 정서(鄭敍)는 '내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산접동새는 이슷하요이다'(『鄭瓜亭曲』)라고 했으며,이조년(李兆年)은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야 아랴마는 多情(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드러 하노라'고 노래했다.

杜鵑이 한을 상징하는 데에는 내력이 있다. 옛 중국의 촉(蜀)에 두우(杜宇)라는 천신(天神)이 있었다. 너무도 인간을 사랑하여 하계(下界)에 내려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후에 백성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蜀의 왕이 되어 망제(望帝)라 불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홍수(洪水)라는 커다란 고민거리가 하나가 있었다.궁리 끝에 별령(鼈靈: 자라의 神)을 재상에 앉히고 홍수를 다스리도록 했다. 과연 별령은 신통력을 발휘해 홍수를 다스렸고 망제는 왕위를 물려 주고 서산(西山)에 은거했다.그러나 왕이 된 별령은 그만 두우의 아내를 차지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두우는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마침내 지쳐 죽게 되었는데, 그때 두견새에게 말했다.

"두견새야! 내 대신 울어서 나의 심정을 사람들에게 전해다오." 망제의 유언을 들은 두견은 즉시 촉으로 날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를 토하면서 울어댔다.어찌나 구성지게 울었던지 蜀의 백성들은 두견새 소리만 들으면 죽은 望帝를 그리워 하며 더욱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토해낸 피가 묻어 붉게 물든 꽃이 바로 진달래꽃이다. 그래서 진달래꽃을 두견화라 부르게 된 것이다. 진달래는 슬픈 사연을 담은 꽃이기도 하다.

두남일인(斗南一人) 두남은 북두칠성의 남쪽. 즉, 온 천하에서 제일가는 賢才를 의미한다.

두동치활(頭童齒豁) 산에 초목이 없음을 동이라고 하고, 활은 이가 빠져서 구멍이 보임을 이른다. 즉 노인을 형용함.

두문불출 杜門不出 문은 닫다 걸고 나가지 않음. 곧, 집 안에만 들어앉아 있고 밖에 나다니지 아니함.

두소지인(斗筲之人(두소지인) 한 말 두 되 들이의 대그릇 같은 사람. 즉, 사람의 식견이나 그릇이 좁은 것을 비유

두시언해(杜詩諺解) 중국 唐나라 杜甫의 시 전편을 52部로 분류하여 한글로 번역한 詩集

두검방맹(杜漸防萌) 漸은 사물의 처음, 萌은 싹, 애당초 싹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 더 큰 害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

두주불사(斗 酒 不 辭)

(斗:말 두. 酒:술 주. 不:아니 불. 辭:말씀 사)

말술도 사양하지 아니한다. 곧 주량이 매우 크다

유방(劉邦)이 秦(진)나라 수도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나라 왕 자영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항우(項羽)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유방을 칠 각오를 다졌다.

유방 또한 항우가 이를 갈고 있다는 걸 알고 항우의 진중에 나아가 해명했다. 이를 역사책에서는 [홍문의 만남(鴻門之會)]이라고 한다. 유방의 변명에 항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항우의 모신(謀臣) 范增(범증)은 이를 호기(好機)로 항우의 사촌동생으로 하여금 칼춤을 추게 하여 유방의 목숨을 노렸다.

유방이 위급한 처지에 있는 걸 알게 된 심복 번쾌가 방패와 칼을 들고 연회장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위병이 가로 막았다. 일개 위병이 어찌 번쾌를 막을 수 있으랴. 위병을 쓰러뜨린 번쾌가 연회장에 뛰어들어 항우를 쏘아보았다. 항우는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만지며 소리쳤다.

"누군가"

"패공 유방의 수행부하 번쾌입니다."

유방의 측근 張良(장량)이 대답해 주었다.

"장사로군. 이 자에게 술을 주도록 하라"

한말들이 술잔이 그에게 주어졌다. 번쾌는 선 채로 단숨에 들이켰다.

"이 자에게 생 돼지 다리를 하나 갖다 주어라"

번쾌는 방패위에다 생 돼지고기를 놓고 썰어 먹었다. 이를 본 천하의 항우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굉장한 장사로군. 한잔 더 하겠나"

"죽음도 사양하지 않는 제가 어찌 술 몇말을 사양하겠습니까(斗酒不辭)"

항우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번쾌는 유방을 구해낼 수 있었다.

두찬 (杜 撰)

(杜:말을 두. 撰:글지을 찬)

杜默(두묵)이 지은 작품. 典據(전거)가 확실하지 못한 저술이나 틀린 곳이 많은 작품을 말함

두묵은 宋(송)나라 때 문인으로 그가 지은 시는 당시의 大家(대가) 歐陽修(구양수)의 작품과 함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두묵은 흔히 규칙에 어긋난 시, 다시 말하면 韻律(운율)이 맞지 않는 시를 지었는데 그 破格(파격) 때문에 인기를 끌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격식에 맞지 않는 詩文을 가리켜 [두묵의 작품](杜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나라의 왕무가 지은 [야객총서]에 나오는 말이다. 왕무는 이 책에서 이렇게도 적고 있다.

"일반적으로 杜는 '그 땅에서 나는 토산물'을 가리키는데 杜자가 붙은 말은 좋지 못하거나 변변치 않다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면 좋지 못한 밭이나 농장을 杜田(두전) 杜園(두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에서 자기 손으로 빚은 묽고 맛없는 술을 杜酒(두주)라고 한다. 그러니까 杜撰도 변변치 못한 작품이란 뜻이 된다"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두묵보다도 전의 문인으로 진종(眞宗) 때에 칙명에 의해 편찬된 [문원영화(文苑英華)]의 편찬자 중 한사람인 성도(盛度)가 인종(仁宗) 때 죽은 장지백(張知伯)의 비문을 썼을 때 상사가 물었다.

"이건 누가 쓴 것인가?"

"도(度)가 찬했습니다."

그러자 일동이 폭소했다.

왕무는 이것으로 보아, "도가 찬했다"는 말을 듣고 웃는 것은 두찬을 연상했기 때문이며 이 두찬이라는 말이 예로부터 있었던 증거라는 것이다.

'두찬'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여러 가지 異說(이설)이 있다. 한가지만 더 들어보자.

송나라 석문렬이 쓴 [상산야록]에서 도교의 경전인 [道藏(도장)]에 관해 언급한 대목에도 [두찬]이란 말이 나온다.

"[도장[ 5 천여권 중 [도덕경] 2권만이 진본이고 나머지는 蜀(촉)나라의 두관정이 쓴 僞作(위작)이다. 이때부터 하찮은 위작을 '두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런 식이어서 '두찬'의 어원도 두찬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杜撰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나라 사정이나 역사를 잘못 기록한 [외국 두찬]이 많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둔필승총 鈍筆勝聰 서투른 글이 총명함 보다 낫다. 곧, 서투른 필적으로라도 글씨로 써서 남기는 것이 사람의 기억보다는 훨씬 오래 보전되다.

득기소 (得 其 所)

(得:얻을 득. 其:그 기. 所:곳 소)

알맞거나 어울리는 자리를 얻음. 능력이나 적성에 걸맞아서 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는 것

춘추시대 鄭(정)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에 子産(자산)이라는 훌륭한 정치가가 있었다. 정나라가 강대국인 楚(초)나라와 晉(진)나라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子産같은 유능한 정치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산은 20여년간 재상자리에 있으면서 나라의 紀綱(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썼으며 외교 능력도 뛰어나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 의도를 번번이 挫折(좌절)시키는 등 많은 治積(치적)을 쌓았다.

어느날 어떤 사람이 자산에게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자산은 연못을 관리하는 하인에게 물고기를 건네주면서 그것을 연못에 놓아 기르도록 했다. 그러나 하인은 子産의 분부를 어기고 그 물고기를 끓여먹고 와서는 이렇게 復命(복명)했다.

"물고기를 연못에 놓아주니까 처음에는 어릿거리고 비실비실하더니 조금 있다가 기운을 차리고는 꼬리를 치면서 연못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하인의 그럴듯한 거짓말을 곧이들은 子産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자리로 갔구먼, 제 자리로 갔어(得其所哉 得其所哉)"라고 말했다.

자산을 감쪽같이 속인 하인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듯 말했다.

"누가 자산을 지혜롭다고 말하는가. 그도 별 수 없더군. 내가 물고기를 끓여 먹은 줄도 모르고 자산은 그 물고기가 '제자리로 갔구먼, 제자리로 갔어'하고 좋아하니 말이야."

자신의 말을 딴 '得其所'는 물고기가 물에서 놀아야 하듯이 능력과 적성에 맞는 자리, 適材適所(적재적소)에 앉혀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득롱망촉(得隴望蜀)

(得:얻을 득. 壟:언덕 롱. 望:바랄 망. 蜀:나라이름 촉)

농땅을 얻으니 촉나라까지 얻고 싶다는 말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

후한(後漢) 때 광무제(光武帝)의 이야기이다. 그 때 나라안은 군웅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장안(長安)에 적미(赤眉), 농서에 외효, 하서(河西)에 공손술(公孫述), 수양(雖陽)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에는 장보(張步) 등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중에 長安의 赤眉, 雖陽에 유영(劉永), 盧江에 이헌(李憲), 蜀의 公孫述 등은 황제의 칭호를 붙이고 있었다. 光武帝는 赤眉, 劉永, 李憲, 張步 등을 모두 토벌하고 나서 그들에게 물었다. 그들 중 서선이라는 자가 말했다.

"저희들은 호랑이 입에서 벗어나 어머니의 품에 돌아왔다고 생각합니다. 항복한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할 뿐, 후회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수는 서선을 향해 만족스럽게 말했다.

"그대는 철중쟁쟁(鐵中錚錚:무리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고 용중교교(庸中교교(人+交)로다."

유수는 그들에게 낙양에 살곳을 마련하고 전답을 하사했다.

이제 남은 것은 농서의 외효와 蜀의 公孫述이 문제였다. 외효는 光武帝에게서 서주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를 받은 적 있었으나, 光武帝의 세력이 커지자 公孫述과 제휴(提携)하여 대항하려 들었다. 그러나 公孫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외효가 보낸 사신을 푸대접하여 돌려 보냈다. 그리고는 光武帝와의 맹약(盟約)을 더욱 두터이 했다.

한편 외효도 光武帝로부터 부하로서 섬길 것을 강요당하자 이에 대항하였으나 도중에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구순(寇恂)이 항복함으로써 농서는 光武帝에 의 손에 평정되고 말았다. 이에 光武帝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본시 욕심이 한이 없는 것이오. 이미 농(壟)을 얻고 또 다시 촉(蜀) 평정하고 싶소. 나는 군사를 한 번 출병시킬 때마다 흰머리가 자꾸만 늘어나오."

이 말은 원정군의 노고를 생각하면 자신은 한없이 괴로워지는데, 자신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이듬 해 드디어 대군을 몸소 거느리고 蜀을 쳐 깨뜨리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得壟望蜀은 여기서 비롯된 말로서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말할 때 쓴다.

득부상부(得斧喪斧) 얻은 도끼나 잃은 도끼나 같다. 득실이 같아서 손해 본 것이 없다

득불상실 得不償失 얻은 것으로써 잃는 것을 보상하지 못하니 손해가 크다는 말이다.

득어망전(得魚忘筌)

(得:얻을 득, 魚:물고기 어, 忘:잊을 망, 筌:통발 전)

물고기 잡히면 물고기를 잡는 두구인 통발을 잊어버린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잊혀져버림. 말은 뜻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므로 뜻을 알았으면 말은 버려도 된다

장자 외물편(外物篇)에는 이런 대목이 보인다.

옛날 堯(요)임금은 許由(허유)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했으나 허유는 달아나 받지 않았다. 殷(은)나라 湯王(탕왕)은 務光(무광)에게 나라를 주려고 했지만 무광은 화를 냈다. 紀他(기타)는 이 소식을 듣자 나라가 자기에게 돌아올까 겁이 나서 제자를 거느리고 관수가에 은거하고 말았다. 제후들은 3년 동안 사람을 보내어 기타를 위로했다

이 유명한 구절에 뒤이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난 뒤에는 통발은 잊어버리고 만다(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 덫은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나 토끼를 잡고 나면 덫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말은 뜻을 나타내는데 쓰이기 때문에 뜻을 알고 나면 말은 잊어버리게 된다. 내 어찌 저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서 그와 더불어 말할 수 있을꼬

장자는 '말을 잊은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 통발과 덫을 잊는다는 말을 전제했다. 장자가 말하는 '말을 잊은 사람'이란 말같은 것은 잊어버려 그에 얽매이지 않는 참된 뜻을 깨달은 사람을 가리킨다.

이렇게 결론을 다른 데로 몰고간 得魚忘筌(득어망전)을 글자 그대로 풀이해 보통 '일단 목적을 달성하면 수단으로 이용하던 물건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득의만면(得意滿面) 뜻한 바를 이루어 기쁜 표정이 얼굴에 가득함

득의양양(得意洋洋) 만족스런 듯 기뻐하는 모습

득일망십(得一忘十) 한 가지를 얻고 열 가지를 잃어버림. 기억력이 좋지 못함을 뜻한다.

등고자비 登高自卑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함. 곧, 모든 일은 순서를 밟아야 함.

등룡망촉 (得 阜+龍 望 蜀)

[얻을 득/ 땅이름 룡/ 바랄 망/ 나라이름 촉]

만족할 줄을 모르고 계속 욕심을 부리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후한을 세운 광무제가 천하통일을 막 이루려고 할 무렵, 당시 세력가들은 대부분 후한에 항복했지만 농서 땅의 의효와 촉 땅의 공손술만은 강력히 저항했다고 합니다. 광무제의 신하들은 이 곳을 당장 토벌하자고 건의했지만 광무제는 언젠가는 자신의 소유가 될 것으로 확신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얼마 뒤 의효가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 의구순이 광무제에게 항복했습니다. 이제 광무제의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촉 뿐! 이에 광무제는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서 땅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 구나."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득룡촉망은 농서지방을 얻고서 촉 지방까지 취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말입니다. 이 고사성어는 <후한서>에서 유래했습니다.

등루거제 (登樓去梯) 높은 다락에 오르라고 하여 놓고 오르고 난 후 사다리를 치운다.즉, 처음엔 남을 기쁘게 해놓고 뒤에 괴롭게 한다.

등용문 登龍門

(登:오를 등. 龍:용 룡. 門:문 문)

용문(龍門)은 중구 황하의 상류에 있는 급류(急流)의 곳으로, 잉어가 그곳에 오르면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음.

용문에 오른다는 뜻. 곧 ① 입신 출세의 관문을 일컫는 말. ② 주요한 시험에 합격하여 뜻을 이룸

등용문엔 상당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사마천의 《史記》는 그가 궁형(宮刑)에 처해진 후 씌어졌다. 사내로서 구실을 할 수 없으므로 조상을 욕되게 하였으니 차라리 죽음으로 대신하겠다는 유혹을 물리치고 완성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史記》을 《龍門史》라 한다.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그가 태어난 곳이 황하 상류의 협곡 '용문'이었기 때문이다.

용문(龍門)은 황하(黃河) 상류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인데 이곳을 흐르는 여울은 어찌나 세차고 빠른지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용문에 오른다'는 것은 극한의 난관을 돌파하고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는 말인데 중국에서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입신 출세의 제일보라는 뜻으로 '등용문'이라 했다.

용문에 대한 것은 북위(北魏)의 역도원의 《수경주(水經註)》에도 보인다.

"다광어는 공혈(鞏穴)을 나와서 석 달이 되면 용문을 오르려고 한다. 만일 오르게 되면 용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점액(點額)하고 돌아온다.

'등용문'에 반대되는 말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인데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물고기를 말한다. 즉 출세 경쟁에서의 패배자, 중요 시험에서의 낙방자를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146∼167)때 정의파 관료의 지도적 인물에 이응[李應:자는 원례(元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 촉군태수(蜀郡太守) 탁료장군(度遼將軍)을 거쳐 하남윤(河南尹:하남 지방의 장관)으로 승진했을 때 환관의 미움을 받아 투옥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력자의 추천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경찰청장)가 되어 악랄한 환관 세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태학(太學)의 청년 학생들은 그를 경모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원례'라 평했으며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이를 '등용문'이라 일컬었다.

[주] 황하 : 청해성(靑海省)의 암네 마친 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토 고원을 침식하면서 동쪽의 발해만(渤海灣)으로 흘러 들어감.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 길이 4100Km. 황하(黃河)의 큰 지류인 위수(渭水) 유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임.

등하불명(燈 下 不 明 )

[등잔 등/ 아래 하/ 아닐 불/ 밝을 명 ] : 등잔 밑이 어둡다는 데서, 가까이 있는 것을 모름을 말함.

등화가친(燈 火 可 親 )

(燈:등불 등. 火:불 화. 可:옳을 가. 親:친할 친)

등불을 가까이 하여 책을 읽음. 가을밤은 서늘하여 등불을 가까이하여 글 읽기에 좋다는 말.

우리나라의 가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높고 파란 하늘에 황금 빛 들판, 여기에다 불타는 단풍까지 곁들여 온통 원색의 장관을 이룬다. 이를 두고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은 천고마비(天高馬肥)니 정안홍엽(征雁紅葉:기러기 날고 단풍이 물듦), 국오수벽(菊傲水碧:국화가 뽐내고 물이 비취처럼 푸름)의 계절이라고 노래했다. 가을은 낭만의 계절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가을은 쾌적한 날씨도 한몫을 톡톡히 한다. 각종 문화 행사가 이때에 집중돼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가을은 문화의 계절이기도 하다. 책읽기에도 여간 좋지 않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가을은 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 했다.

唐의 문호 한유(韓愈)에게는 아들 창(昶-字는 符)이 있었다. 그는 아들의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符讀書城南(부독서성남)'이라는 詩를 썼다.

時秋積雨霽(시추적우제) - 바야흐로 가을, 장마도 걷히고

新凉入郊墟(신량입교허) - 마을과 들판에 서늘한 바람

燈火稍可親(등화초가친) - 이제 등불을 가까이 할 수 있으니

簡編可舒卷(간편가서권) - 책을 펴 보는 것도 좋으리

그렇다 우리 조상들은 이 때가 되면 희미한 등불을 가까이 두고 귀뚜라미 소리를 벗삼아 책을 읽곤 했다. 이젠 전등이 대낮같이 밝히는 세상이 되었으니 電燈可親의 계절이라 해야 겠다.


'고사성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0) 2019.05.31
  (0) 2019.05.31
라,마  (0) 2019.05.31
  (0) 2019.05.31
  (0) 2019.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