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범이네할배 2019. 5. 31. 19:51

자가당착(自 家 撞 着 )

[ 스스로 자/ 집 가/ 칠 당/ 붙을 착 ] : 같은 사람의 문장이나 언행이 앞뒤가 서로 어그러져 모순됨.

자강불식 (自 强 不 息 )

[ 스스로 자/ 굳 셀 강/ 아니 불/ 숨쉴 식 ] :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아니함.

‘역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천체의 운행은 건실하다(天行健). 군자는 그것으로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君子以自强不息)’. 천체인대자연의 변화는 정상적이며 어긋남이 없습니다. 매우 높은 학식과 덕행을 가졌거나 높은 관직에 있는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지혜와 품성, 도덕을 닦는 데 힘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격지심 (自 激 之 心 )

[ 스스로 자/ 물결 부딪쳐 흐를 격/ 갈 지/ 마음 심 ] : 어떤 일을 해 놓고 자기 스스로 미흡(未洽)하게 여기는 마음.

자고이래(自 古 以 來) 예로부터 지금까지.

자괴지심(自 愧 之 心)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자급자족(自 給 自 足) 자기의 수요를 자기가 생산하여 충당함

자기기인(自 기 기 人)

자두연기(煮 豆 燃 萁) 콩을 볶는 데 콩깍지를 태운다. 형제끼리 서로 미워하고 들볶는 것.(=煮豆燃豆萁)

자로부미(子 路 負 米) 가난하게 살면서도 효성이 지극하여 갖은 고생을 하며 부모의 봉양을 잘함.(=百里負米)

자린고비(玼 吝 考 妣) 아니꼬울 정도로 인색하고 비정한 사람을 꼬집어 이르는 말.

자막집중(子 莫 執 中) ( 아들 자/ 없을 막/ 잡을 집/ 가운데 중 ) :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자수성가(自 手 成 家 )

[ 스스로 자/ 손 수/ 이룰 성/ 집 가 ] : 물려 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한 살림을 이룩하는 것.

자모패자(慈 母 敗 子) 慈母에 敗子 있다고 한다. 과보호는 아이들을 잘못되게 만든다는 것.

자문자답(自 問 自 答) 제가 묻고 제가 대답함.

자부작족(自 斧 斫 足) 제 도끼에 제 발을 찍듯 자기 일을 자기가 망친다.

자성제인(子 誠 齊 人) 견문이 아주 좁아 하나밖에 모르고 고루한 사람

자수삭발(自 手 削 髮) 제 손으로 머리를 깎음. 하기 어려운 일을 남의 힘을 빌지 않고 제 힘으로 처리한다는 뜻이다.

자수성가(自 手 成 家)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한 살림을 이룩함.

자승자박(自 繩 自 縛 )

[ 스스로 자/ 줄 승/ 스스로 자/ 묶을 박 ] : 제 줄로 제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말이나 행동으로 자기가 속박(束 縛 )을 당하는 것을 말함.

한서(漢書)‘유협전’에 나오는 ‘자박’에서 유래한말입니다. 원섭의 노비가 백정과 말다툼을 한뒤 죽이게 되자 무릉의 태수윤공이 원섭을 죽이려고 하여 협객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원섭이 종이 법을 어긴 것은 부덕한 탓이다. 그에게 웃옷을 벗고 스스로 옭아 묶어, 화살로 귀를 뚫고 법정에 나가서 사퇴하게 하면 당신의 위엄도 유지될 것이다.”

원래는 궁지에 몰려서 항복의 표시로 자신의 몸을 묶고 관용을 청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함을 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초래하는 것을 비유한 고사성어입니다.

자아도취(自 我 陶 醉) 자기가 어떤 것에 끄려 취하다시피 함.

자아성찰(自 我 省 察)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여 살핌

자업자득 (自 業 自 得 )

[ 스스로 자/ 업 업/ 스스로 자/ 얻을 득 ] :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果 報 )를 자기 자신이 받는 일.

자연도태(自 然 淘 汰) 자연적으로 환경에 맞는 것은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없어짐

자작지얼(自 作 之 孼) 자기가 저지른 일로 인해 생기게 된 재앙. 자승자박(自繩自縛).

자중지란(自 中 之 亂) : 자신의 한 동아리 내에서 벌어지는 싸움.

자초지종(自 初 至 終) : 처음부터 끝까지 일의 전개 내용.

자포자기(自 暴 自 棄)

[自:스스로 자. 暴:사나울 포. 棄:버릴 기.]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돌보지 아니함.

전국 시대를 살다간 아성(亞聖) 맹자(孟子)는 '자포''자기'에 대해《맹자》>이루편(離婁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포(自暴: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과는 더불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자기(自棄:스스로를 버림)하는 사람과도 더불어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입만 열면 예의 도덕을 헐뜯는 것을 자포라고 한다. 한편 도덕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인(仁)이나 의(義)라는 것은 자기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自棄)라고 한다. 사람의 본성(本性)은 원래 선(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도덕의 근본 이념인 '인'은 편안한 집[安]과 같은 것이며, 올바른 길인 '의'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정로(正路:正道)이다. 편안한 집을 비운 채 들어가 살려 하지 않으며 올바른 길을 버린 채 그 길을 걸으려 하지 않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로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자포하는 사람과는함께 이야기할 것이 못되며)

自棄者 不可與有爲也(자기하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것이 못 된다)

言非禮義 謂之自暴也(예와 의를 비난하는 것을 자포라 하고)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내 몸이 인 속에 살며 의로운 곳으로 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라고 한다)

[주] '자포자기'란 말은 맹자가 어느 때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학대(虐待)하고 돌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자행자지[ 自 行 自 止 ] ( 스스로 자/ 갈 행/ 스스로 자/ 발 지 ) :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음.

자화자찬(自 畵 自 讚) 자기가 그린그림을 칭찬한다는 말로 자기의 행위를 칭찬함

작법자폐[ 作 法 自 斃 ]

( 지을 작/ 법 법/ 스스로 자/ 넘어질 폐 )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죽는다.

작법자폐는 제가 놓은 덫에 제가 치인다는 속담과 비슷한 말이다.

진나라 효공은 진나라가 다른 나라로부터 무시를 받을 정도로 전략한 것을 한탄했습니다.

그래서 전성시대 영광을 다시 되찾겠다는 욕망에 불타올랐습니다. 효공은 그런 자신의 욕망을 이루어낼 만한 상앙이라는 사람을 뽑아 재상의 자리에 앉혔습니다. 상앙은 먼저 낡은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상앙의 이와 같은 주장을 다른 신하들은 반대했지만 효공의 찬성에 상앙의 변법이 탄생합니다. 이와 같은 법률 개선으로 진나라는 다시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효공이 죽자 평소 상앙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던 다른 신하들이 상앙을 모함해 죽이려 했습니다. 상앙은 그렇게 도망을 치게 되고 어느 주막에 숨어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막 주인은 "손님의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는 재워드릴 수 없습니다. 이를 어기면 큰 벌을 받습니다." 라고 말하며 상앙을 재워주기를 거부했습니다.

이와 같은 법은 상앙 자신이 만든 법이었습니다. 이에 상앙은 "내가 만든 법 때문에 내가 죽는 구나" 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작사도방(作 舍 道 傍) 길 곁에서 집짓기란 의미로, 길에 많은 사람들의 이견 때문에 집 짓는 일에 진척이 없는 모습.

작수성례(酌 水 成 禮) 물을 떠 놓고 혼례를 행한다. 형세가 가난하여 혼례를 간략하게 지냄.

작심삼일(作 心 三 日) 한번 결심한 것이 사흘을 가지 않음. 곧 결심이 굳지 못함

작약지증[ 勺 藥 之 贈 ] ( 구기 작/ 약 약/ 갈 지/ 보낼 증 ) : 남녀간에 향기로운 함박꽃을 보내어 정을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장경오훼(長 勁 烏 喙) 越王 句踐을 평한 말로, 患難은 같이 할 수 있으나 안락은 같이 누릴 수 없는 人相을 이름

장두노미(藏 頭 露 尾)

(감출 장, 머리 두, 드러낼 노, 꼬리 미)

진실을 숨기려고 하지만 거짓의 실마리는 이미 드러나 있다는 의미다.

속으로 감추면서 들통 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빗댄 표현이기도 하다. 이 사자성어는 쫓기던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처박고서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쩔쩔매는 모습에서 생겨났다.

장맥분흥(張 脈 憤 興) 사람이 격분하거나 흥분하면 혈맥의 움직임은 강한 모습을 띄게 되지만, 그 속은 마르게 됨

장삼이사(張 三 李 四)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란 뜻 이름 없는 사람들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비유.

장생불사(長 生 不 死) 오랫동안 살아 죽지 아니함.

장수선무[ 長 袖 善 舞 ]

[길 장, 소매 수, 좋을 선, 춤출 무]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출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여건이 좋은 사람이 더 유리하다는 말

능력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유리한 조건이 곁들여지면 반드시 더욱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할 수 있다는 뜻인 다전선고(多錢善賈)를 덧붙여 쓰기도 한다.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인 韓非子의 《韓非子》<오두편>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소매가 긴 옷을 입으면 춤을 잘 출 수 있고 돈이 많으면 장사하기 좋다(長袖善舞 多錢善賈)'고 했다 이것은 자산이 풍부하면 일을 하기가 쉽다는 것을 말한다.그러므로 정치가 잘 되어 있는 강대국은 계획을 꾸미기 쉽고 정치가 어지러운 약소국은 계획을 꾸미기가 어렵다. 진(秦)나라와 같은 부강한 나라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열번이나 계획을 바꾸어도 실패하는 일이 드물다. 반대로 연(燕)나라 같은 약소국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계획을 한번만 바꾸어도 성공을 거두기가 힘든다.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은 진나라의 관리가 지혜가 있는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연나라의 관리가 어리석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결국 나라라 잘 다스려져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밑바탕의 차이일뿐이다."

여기서 한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어느 나라이건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재를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런 훌륭한 인재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잘 정비되어 있는 체제와 제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두]란 말은 '국가를 좀먹는 <다섯 종류의 좀>이라는 뜻으로 한비자는 학자와 유세하는 선비와 협객과 상공업자와 국가의 공민으로서 의무를 버리고 권세가의 식객노릇을 하는 사람들을 들어, 이와같은 국가의 기생충은 정치의 문란에서 발생하며, 그 문란을 선동하는 존재이므로, 임금된 사람은 그들의 언론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그들의 행동을 용서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장야지음[ 長 夜 之 飮 ] ( 길 장/ 밤 야/ 갈 지/ 마실 음 ) : 날이 새어도 창을 가리고 불을 켜 논 채 계속하는 주연(酒술 주 宴잔치 연)을 말한다.

장유유서(長 幼 有 序) 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음.

장장하일(長 長 夏 日) 기나긴 여름 날.

장주지몽(莊 周 之 夢) 장주라는 사람이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실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는 고사.

장중보옥[ 掌 中 寶 玉 ] ( 손바닥 장/ 가운데 중/ 보배 보/ 옥 옥 ) : 손에 쥔 옥. 사랑하는 자식이나 매우 귀중한 물건.

재고팔두(才高八斗)

[才:재주 재. 高:높을 고. 八:여덟 팔. 斗:말 두]

재주의 뛰어남이 여덟 말이다. 즉 문인의 재질이 뛰어남

한헌제(漢獻帝) 건안(建安) 20년 봄. 조조가 병사하고 그 아들 조비가 위왕(魏王)이 되어 건안 25년을 연강(延康) 원년으로 고쳤다. 그가 비록 권좌에 올랐으나 항시 염두에 두는 경계의 인물은 그의 동생 조식(曹植)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므로 장차 대세가 그에게 기울어질 것을 걱정한 것이다. 부친(조조)의 문상을 문제 삼아 대장 허도로 하여금 4천의 병사를 솔거하여 그를 체포하게 한 것이다.

조비의 모후가 나선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조비에게 애걸했다.

"너의 동생 식이가 재학은 높으나 권자에 뜻이 없다는 것을 너 역시 알고 있지않느냐. 그러니 여하한 잘못이 있더라도 목숨만은 보존시겨라."

모친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조비는 승낙했다. 이때 조식이 편전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상국 허흠이 찾아왔다.

"조식의 재주는 기이하게 사람을 따르게 합니다. 서둘러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장차 대왕께선 큰 화를 입으실 것입니다."

조비는 고개를 저었다. 모친과 약속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읽은 상국 허흠이 방책을 내놓았다.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은 재학(才學)입니다. 그는 뛰어난 문재(文才)인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시켜 그이 재지(才智)를 시험해 보시어 시답(詩答)을 분명히 하지 못하면 멀리 귀양을 보내시어 다시는 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조식은 형제간의 우의를 제목으로 일곱 걸음 걸을 동안 한 글을 짓게 되었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시를 짓게 하였으므로 <칠보시(七步詩)> 라는 이름을 붙었다. 물론 시구에는 형제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 조식은 즉흥적으로 한 수의 시를 지어 하를 면했다. 즉흥적으로 지었다기 보다는 신기에 가까웠다.

煮豆燃豆기 (자두연두기)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豆在釜中泣 (두재부중읍)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本是同根生 (본시동근생)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 (상전하태급)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조비 역시 이 시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 남조(南朝)의 사영운(謝靈運)이 그를 칭찬하여 말했다.

"천하의 재지가 전부해야 한 섬인데(天下才共一石), 자건 혼자서 여덟말을 얻었다(子建獨得八斗)"

재대난용(材 大 難 用) 재목이 너무 크면 쓰이기 곤란하다. 즉, 재주 있는 사람이 쓰이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

재상팔덕(宰 相 八 德) 재상이 지녀야할 충(忠), 직(直), 명(明), 변(辯), 서(恕), 용(容), 관(寬), 후(厚)의 여덟 가지 덕

재승박덕[ 才 勝 薄 德 ] ( 재주 재/ 이길 승/ 엷을 박/ 덕 덕 ) : 재주는 있으나 덕이 없음.

재대난용[ 材 大 難 用 ] ( 제목 재/ 큰 대/ 어려울 난/ 쓸 용 ) : 재목이 너무 크면 쓰이기 곤란하다. 즉, 재주 있는 사람이 쓰이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

재자가인[ 才 子 佳 人 ] ( 재주 재/ 아들 자/ 아름다울 가/ 사람 인 ) : 재주가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

쟁어자유(爭 魚 者 濡) (다툴 쟁. 고기 어. 사람 자. 젖을 유)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은 물에 젖는다 .이익을 얻으려고 다투는 사람은 언제나 고생을 면치 못함을 비유하는 말.

적반하장(賊 反 荷 杖) : 도적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 해를 가하고도 미안해 하기는 커녕 무례하게 굴다.

적소성대 ( 積 小 成 大 )

( 쌓을 적/ 작을 소/ 이룰 성/ 큰 대) :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됨.

적수공권(赤 手 空 拳)

( 붉을 적/ 손 수/ 빌 공/ 주먹 권 ) : 맨손과 맨주먹, 즉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뜻.

적우침주 ( 積 羽 沈 舟 )

( 쌓을 적/ 깃 우/ 가라앉을 침/ 배 주 ) : 가벼운 새의 깃털도 많이 쌓이면 그 무게로 배를 가라앉게 함. 곧 작은 힘도 합하면 큰 힘이 된다.

적자지심 ( 赤 子 之 心 )

( 붉을 적/ 아들 자/ 갈 지/ 마음 심 ) :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의 마음. 갓난아이 같이 거짓이 없는 마음.

적진성산 (積 塵 成 山 )

[ 쌓을 적/ 티끌 진/ 이룰 성 / 뫼 산 ] : 티끌모아 태산. 작은 것도 쌓이면 크게 된다는 말.

적토성산(積 土 成 山 )

(쌓을 적/ 흙 토/ 이룰 성/ 뫼 산 ) ; 흙이 쌓여 산을 이룸. 작은 것을 힘써 모아서 큰 것을 이룸을 뜻하는 말이다.

전가통신(錢 可 通 神)

[錢:돈 전. 可:옳을 가. 通:통할 통. 神:귀신 신]

돈은 귀신하고도 통할 수 있다. 곧 돈의 힘은 일의 결과를 좌지우지한다는 뜻

당(唐)나라때 장연상(張延賞)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그는 책도 웬만큼 읽었고 행정 능력도 있어 벼슬길은 순탄했다. 그가 하남(河南) 부윤(府尹)으로 있을 때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 커다란 의혹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데 황제의 친척을 비롯해서 전직 고관과 지방 유지들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연상은 사건이 사건인 만큼 혐의자를 모두 잡아들이도록 명령하려 하자 누군가가 말렸다. 그러나 장연상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임금의 녹(綠)을 먹는 자는 임금의 근심을 감당해야 한다(食君之綠 擔君之憂·식군지록 담군지우)는 말이 있소. 황제의 친척이니 거물급 소물급 할 것 없이 모두 엄하게 다스릴 것이오."

명령이 내려진 다음날 부윤의 책상위에 쪽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삼만금을 바치오니 더 이상 이 사건을 추궁치 말아달다'는 내용이었다. 장연상은 서슴없이 쪽지를 마룻바닥에 팽개쳤다.

그 다음날 또 장연상의 책상위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십만금'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돈을 은밀히 전해 받은 장연상은 사건을 흐지부지 끝내 버렸다. 뒷날 어떤 사람의 추궁에 그는 말했다.

"십만금은 神하고도 통할 수 있는(錢可通神) 액수인데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나를 죽였을 것이네."

장연상은 너무나 자신감이 넘치게 말을 했다. 본래 이 성어는 유전능사귀추마(有錢能使鬼推磨)와 통한다. 돈만 있으면 귀신을 불러서라도 능히 연자맷돌을 돌리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뇌물에 대한 차원 높은 풍자다.

전거가감[ 前 車 可 鑑 ] ( 앞 전/ 수레 거/ 옳 가/ 거울 감 ) : 앞 수레는 뒷 수레의 거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전거보도[ 傳 家 寶 刀 ] ( 전할 전/ 집 가/ 보배 보/ 칼 도 ) : 조상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집안의 보물이라는 뜻.

전거복철[ 前 車 覆 轍 ] (앞 전/ 수레 거/ 뒤집힐 복/ 바퀴자국 철) :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자국이란 뜻으로 앞의 실패를 거울로 삼으라는 의미.

전거후공[ 前 倨 後 恭 ]

[前:앞 전. 倨:오만할 거. 後:뒤 후. 恭:공손할 공]

이전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말로, 상대편의 입지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 것을 비유함.

춘추전국시대에 종횡가로 손꼽히는 소진이 있었다.

그는 본래 낙양 사람으로 귀곡자를 스승으로 섬겼고, 수년동안 제후들에게 유세하러 다니기도 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결국 실의에 빠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낙향에 아내와 형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형수는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비웃었다. 소진은 두문불출하고는 마침내 종횡의 이론을 생각했다.

소진은 연나라와 조나라로 가서 제, 초, 위, 한 등 6개 나라가 연합하여 막강한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건의를 했다. 결국 그의 견해는 받아들여져 6국은 소진을 승상의 지위까지 맡겨 진나라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진은 어느 날 북방에 있는 조나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옛날 생각이 나서 고향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그가 집에 도착하자, 그의 형제와 아내는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곁눈질하며 시중을 들었다. 특히 형수의 태도는 더욱 공손하였다. 소진은 그 모습을 보고 형수에게 물었다.

"옛날에는 무척 거만했는데, 지금은 이다지도 공손해지셨습니까?"

"이제는 서방님의 지위가 높아 감히......"

이 말을 듣고 난 소진은 한탄하며 이렇게 되뇌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진인데, 부귀할 때는 남들이 두려워하고 빈천할 때는 멸시하니, 부와 명예가 이렇게도 대단하던가!"

우리 주변에도 소진의 형수같은 무리들이 적지 않음을 자주 보게 된다. 특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때와 그렇지 못할 때 추종자들의 그들에 대한 상반 된 태도는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면이 많다.

전광석화 (電 光 石 火)

[ 번개 전/ 빛 광/ 돌 석/ 불 화 ] : 전광(電光:번갯불)과 석화(石火:돌이 서로 부딪치거나 또는 돌과 쇠가 맞부딪칠 때 일어나는 불). 아주 짧은 시간. 아주 빠른 동작

전도양양 (前 途 洋 洋 )

[ 앞 전/ 길 도/ 바다 양/ 바다 양 ] : 앞길이 드넓은 바다처럼 한이 없다는 데서, 앞길이 탁 트여 있음을 말함.

전도요원 [ 前 道 遼 遠 ] ( 앞 전/ 길 도/ 멀 요/ 멀 원 ) : 앞으로 길길이 아득히 멀다. 목적한 바에 이르기에는 아직도....

전복후계 [ 前 覆 後 戒 ]

앞 수레가 뒤집힌 자국은 뒷 수레의 좋은 경계가 된다. 앞의 실수를 경계로 삼아야 한다.

전인미답 [ 前 人 未 踏 ] ( 앞 전/ 사람 인/ 아닐 미/ 밝을 답 ) : 이제까지의 세상사람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함. 이제까지의 세상 사람이 아무도 해보지 못함.

전전긍긍(戰 戰 兢 兢)

[戰:무서워 떨(싸움할)전. 兢:조심할 긍]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는 모양.

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인《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不敢暴虎(불감포호)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憑河(불감빙하)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人知其一(인지기일)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莫知其他(막지기타) 그 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戰戰兢兢(전전긍긍)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如臨深淵(여림심연)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履薄氷(여리박빙)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하네

[주]'暴虎憑河(포호빙하)'는 《論語》<述而篇>에. '戰戰兢兢'은 《論語》<泰伯篇>에 인용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論語》에서는 증자가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훼상하면 불효이므로 혹시나 몸을 상할까 전전긍긍했다 한다. 요즈음에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적발 당할까봐 쩔쩔매는 경우'에 이 말이 흔히 쓰이고 있음.

[준말] 전긍(戰兢).[동의어] 전전공공(戰戰恐恐).[유사어] 소심익익(小心翼翼).

전전반측(輾 轉 反 側)

[輾:돌아누울 전, 轉:구를 전, 反:돌이킬 반, 側:곁 측]

이리저리 뒤척이다. 어떤 일에 대한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輾은 반바퀴, 轉은 한바퀴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輾轉이라면 몸을 굴리는 것을 말하며, 反側은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을 말한다. 곧 잠을 이루지 못해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면 걱정되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輾轉不寐(전전불매)라고도 한다. 그러나 본디 輾轉反側의 뜻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남자가 미모의 여인을 사모한 나머지 잠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相思病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詩經]의 맨 첫머리에 보면 관저(關雎)라는 詩가 있다. 한 남자가 어여쁜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노래이다.

窈窕淑女(요조숙녀) - 아리따운 아가씨

寤寐求之(오매구지) - 자나깨나 그리네

求之不得(구지부득) - 그래도 안되어서

悠哉悠哉(유재유재) - 아! 끝없는 사모함

輾轉反側(전전반측) - 잠못들어 뒤척이네.

얼마나 그랬으면 잠못들어 뒤척일까. 이렇게 볼 때 輾轉反側은 결코 나쁜 뜻이 아니라 매우 낭만적인 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전정만리 (前 程 萬 里 )

[ 앞 전/ 단위 정/ 일만 만/ 마을 리 ] : 앞길이 만 리라는 뜻으로, 전도가 매우 유망(有望)함을 이름. 나이가 젊어 장래가 유망함. 전도만리(前途萬里). 전도양양(前途洋洋). 전도유망(前途有望).

전차복철 [ 前 車 覆 轍 ]

[前:앞 전. 車:수레 차 거. 覆:엎어질 복. 轍:바퀴자국 철].

앞 수레가 엎어진 바퀴 자국이란 뜻. 곧 ① 앞사람의 실패. 실패의 전례. ② 앞사람의 실패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

① 전한 5대 황제인 문제(文帝)때 가의(賈誼:B.C. 168∼210)라는 명신이 있었다. 그는 문제가 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역사에 인군(仁君)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크게 기여한 공신인데, 당시 그가 상주한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속담에 '앞 수레의 엎어진 바퀴 자국[前車覆轍]'은 뒷수레를 위한 교훈[後車之戒]이란 말이 있사옵니다. 전 왕조인 진(秦)나라가 일찍 멸망한 까닭은 잘 알려진 일이 온데, 만약 진나라가 범한 과오를 피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前轍)을 밟게 될 뿐이옵니다. 국가 존망, 치란(治亂)의 열쇠가 실로 여기에 있사오니 통촉하시오소서."

문제는 이후 국정 쇄신에 힘써 마침내 태평 성대를 이룩했다고 한다.

② 이 말은《설원(說苑)》〈선설(善說)〉에도 실려 있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어느 날 중신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다. 취흥(醉興)이 도도한 문후가 말했다.

"술맛을 보지 않고 그냥 마시는 사람에게는 벌주를 한 잔 안기는 것이 어떻겠소?"

모두들 찬동했다. 그런데 문후가 맨 먼저 그 규약을 어겼다. 그러자 주연을 주관하는 관리인 공손불인(公孫不仁)이 술을 가득 채운 큰잔을 문후에게 바쳤다. 문후가 계속 그 잔을 받지 않자 공손불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차 복철은 후차지계'란 속담이 있사온데, 이는 전례를 거울삼아 주의하라는 교훈이옵니다. 지금 전하께서 규약을 만들어 놓으시고 그 규약을 지키지 않는 전례를 남기신다면 누가 그 규약을 지키려 하겠나이까? 하오니, 이 잔을 받으시오소서."

문후는 곧 수긍하고 그 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후 공손불인을 중용했다고 한다.

[준말] 복철(覆轍). 전철(前轍)[대응어]∼후차지계(後車之戒).

전첨후고 [ 前 瞻 後 顧 ] ( 앞 전/ 볼 첨/ 뒤 후/ 돌아볼 고 ) : 일을 당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앞뒤만 재어 봄

전호후랑 [ 前 虎 後 狼 ] ( 앞 전/ 범 호/ 뒤 후/ 이리 랑 ) : 앞문의 호랑이를 막으니 뒷문의 이리가 나온다

전화위복(轉 禍 爲 福)

[轉:구를 전. 禍:재화 화. 爲:할 위·될 위. 福:복 복.]

[동의어]인화위복(因禍爲福). [유사어]새옹지마(塞翁之馬).

① 화(禍)를 바꾸어 오히려 복(福)이 되게 함. ②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됨.

전국시대 합종책(合從策)으로 6국, 곧 한(韓) 위(魏)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재상을 겸임했던 종횡가(縱橫家:모사) 소진(蘇秦)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옛날에 일을 잘 처리했던 사람은 '화를 바꾸어 복을 만들었고[轉禍爲福]' 실패한 것을 바꾸어 공(功)으로 만들었다[因敗爲功]."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 소진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주(周)나라의 도읍 낙양[洛陽:산서성(山西省) 내] 사람. 근처의 귀곡(鬼谷)에 은거하던 수수께끼의 종횡가 귀곡 선생[鬼谷先生:제반 지식에 통달한 인물로서 종횡설을 논한《귀곡자(鬼谷子)》3권을 지었다고 함]에게 배웠음. 따라서 소진이 죽은 뒤 연횡책(連橫策)을 펴 합종책을 깨뜨린 장의(張儀:?∼B.C. 309)와는 동문이 되는 셈. 제(齊)나라에서 살해됨.(?∼B.C. 317).

흔히 轉禍爲福하면 塞翁之馬(새옹지마)를 연상하곤 한다. 또 다른 제2의 새옹지마를 알아본다.

옛날 춘추시대 宋나라에 한 착한 노인이 있었다. 하루는 그 집의 검은 소가 흰 송아지를 낳았다. 이상하게 여겨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하니 吉祥(길상)의 징조라며 희생물로 바치라고 했다. 착한 노인은 그대로 했다. 하지만 1년쯤 지나 노인을 까닭도 없이 눈이 멀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흰 송아지를 낳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다시 아들을 점쟁이에게 보내 점을 치게 했다.

"믿을 수 없는 점쟁이인데 무엇하러 가나요?"

아들을 잘 타일러 보냈더니 점괘는 전과 똑같이 나왔다. 물론 노인은 이번에도 그대로 했다. 그러나 다시 1년이 지나자 이번에는 아들마저 눈이 멀게 되었다.

얼마가 지난 옆의 楚(초)나라가 쳐들어와 성을 포위했다. 양식이 떨어진 성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서로 잡아먹는 참극이 벌어졌다. 장정은 전사하고 노인, 병자들만 남아 지키다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대로한 楚王은 이들을 모두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눈이 멀어 미처 성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노인 부자는 이 禍를 면할 수 있었으며 다시 얼마가 지나자 눈이 멀쩡하게 밝아졌다고 한다.

절고진락 [ 折 槁 振 落 ] ( 꺽을 절/ 마를 고/ 떨진 진/ 떨어질 락 ) : 고목을 자르고, 낙엽을 움직이게 한다. 매우 쉬운 일

절골지통 [ 折 骨 之 痛 ] ( 꺽을 절/ 뼈 골/ 갈 지/ 아플 통 ) : 뼈가 부러지는 아픔이라는 뜻으로 매우 견디기 어려운 고통.

절발역주 [ 截 髮 易 酒 ] ( 끊을 절/ 터럭 발/ 바꿀 역/ 술 주 ) : 손님이 왔으나 대접할 것이 없어 머리카락을 잘라 술을 사서 손님을 대접함.

절영지회 [ 絶 纓 之 會 ]

[絶:끊을 절. 纓:갓끈 영. 之:어조사 지. 會:모일 회]

갓끈을 끊고 노는 잔치. 어려움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그 보답이 있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전투에 이겨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문무백관을 초대했다. 신하들이 모두 큰 소리로 환성을 지르며 왁자지껄 소란했다. 바로 그때 등불이 꺼지더니 왕의 애첩이 비명을 질렀다. 어느 누가 그녀의 가슴을 더듬고 희롱했던 것이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그 사나이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왕에게 호소했다.

"폐하, 등불을 켜게 하시고 갓끈이 없는 자를 잡아 주세요."

불만 켜면 갓끈이 끊긴 자가 바로 감히 왕의 애희(愛姬)를 희롱한 자라는데 드러날 판이었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큰소리로 모두에게 갓끈을 떼어 던지도록 했다. 따라서 다시 불을 켜도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장수가 갓끈을 뗀 뒤라 누가 그런 무엄한 짓을 했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3 년 후 진(秦)나라와 전쟁이 벌어져 진군에 패한 왕이 위급에 빠져 있자 목숨을 내던져 분전하여 왕을 구하고 그의 용기 덕분에 드디어 대승을 거두게 한 장수가 있었다. 장웅(蔣雄)이란 장수였다. 장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를 불러 물었다.

"나는 평소에 그대를 특별히 우대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토록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는가?"

그러자 그 장수가 엎드려 말했다.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3년 전에 갓끈을 뜯겼던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 폐하의 온정으로 살아날 수 있었으니 그 뒤로는 목숨을 바쳐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 뿐입니다."

이 싸움에서 진에게 이기고 난 다음부터 초는 차츰 강대해져서 장왕은 급기야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절장보단 [ 絶 長 補 短 ] ( 끓을 절/ 길 장/ 기울 보/ 짧을 단) :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에 보강한다는 뜻으로, 장점으로 단점을 보충함을 일컫는 말.

절전지훈 [ 折 箭 之 訓 ] ( 꺽을 절/ 화살 전/ 갈 지/ 가르칠 훈 ) : 가는 화살도 여러 개가 모이면 꺾기가 힘들 듯 여러 형제가 협력하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절차탁마 [ 切 磋 琢 磨 ]

[切:끊을 자를 절. 磋:탄식할 찬탄할 차. 琢:쫄 탁. 磨:갈 마].

[원말]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 [준말] 절마(切磨).

뼈 상아 옥 돌 따위를 깎고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 곧 ① 수양에 수양을 쌓음의 비유. ② 학문 기예 따위를 힘써 갈고 닦음의 비유.

언변과 재기가 뛰어난 자공(子貢)이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貧而無諂]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富而無驕].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

"좋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貧而樂道]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富而好禮]."

공자의 대답에 이어 자공은 또 이렇게 물었다.

"《시경(詩經)》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象牙)를 잘라서 줄로 간 것[切磋]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硏磨]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긴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이제 너와 함께《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로다."

절치부심(切 齒 腐 心) : 몹시 분하여 이를 갈고 속을 썩이다.

절풍목우 [ 切 風 沐 雨 ] ( 끊을 절/ 바람 풍/ 머리 감을 목/ 비 우 ) : 바람으로 빗을 삼아 머리를 빗고 비로 머리를 감는다(큰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함)

절 함(折 檻)

[折:꺾을 절. 檻:난간 함]

난간을 부러뜨리다는 말. 강력하게 직간하다가 어전의 난간을 부러뜨렸다 해서 충신의 직간을 뜻함.

전한(前漢) 성제(成帝)때, 정승으로 있던 안창후 장우(張禹)는 성제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성제를 믿고 안하무인격의 행동도 서슴지 않고 했지만, 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그 누구도 이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

어느날 유학자인 괴리자사 주운(朱雲)이 성제에게 간언을 하였다.

"지금 조정의 대신들은 위로는 폐하를 올바른 길로 이끌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무익한 일만 하면서 녹을 축내고 있으니, 도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천자가 쓰시는 참마검(斬馬劍:말을 벨 수 있는 칼)을 주신다면, 간사한 신하 한 명의 목을 베어 신하들을 경계시키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놀라 술렁거리자 성제가 물었다.

"간사한 신하가 누구인가?"

주운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바로 장우입니다."

이 말을 듣자 성제는 자신의 스승을 간사한 신하로 폄하한 주운을 당장 끌어내라고 소리 쳤다. 무관들이 주운을 끌어내려고 하자 주운은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난간을 붙들고 발버둥치며 장우의 목을 베어야 한다는 말만 계속하여 반복하는 것이었다. 무관과 주운이 밀고 당기다가 그만 난간이 부러져(折檻) 두 사람은 부러진 난간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장군 신경기(辛慶忌)가 주운의 충성에 감동하여 뛰쳐나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간절히 간했다. 이마에선 선혈이 흘러내렸다. 사태가 이쯤되자 성제도 한숨쉬며 말했다.

"짐의 잘못이었소. 공연히 충신을 잃을 뻔했구나. 난간은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말로 부서진 것을 그대로 붙이도록 하라. 직언을 간한 신하의 충성의 정표로 삼겠다."

점입가경(漸入佳境)

[漸:점차 점, 入:들 입, 佳:아름다울 가, 境:지경 경]

경치나 문장, 사건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됨.

고개지(顧愷之·344∼405)는 中國 東晉시대 名畵家로 書藝(서예)의 王羲之(왕희지)와 함께 당시 藝林(예림)의 雙璧(쌍벽)을 이뤘다. 그는 多才多能(다재다능)한 화가였으며 여기에다 독특한 인품으로 謝安(사안)은 그를 '天地開闢(천지개벽)이래 최고의 인물'이라고 했다. 당시는 불교가 성했는데 절을 짓는 것이 유행처럼 돼있었다. 그는 불교 인물화에 뛰어났다.

365年 南京에 있던 승려들이 와관사(瓦棺寺)를 짓기로 했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 헌금자를 모으기로 했는데 몇 달을 노력했지만 예정액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초라해 보이는 20세의 청년이 와서는 말했다.

"내가 백만전을 내겠소. 그러니 절이 완공되거든 알려 주시오."

드디어 절이 완공되었다. 그 청년은 불당 한 칸을 깨끗이 정리시키고는 불당의 벽에다 유마힐(維摩詰)의 불상을 그렸다. 뛰어난 필치로 얼마나 정교하게 그렸던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의 그림은 삽시간에 알려져 이를 보러 오는 이들의 布施(보시)가 금세 백만전을 넘었다고 한다. 이 청년이 바로 고개지였다. 또 하나의 代表作 여사잠도(女史箴圖)는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처럼 그는 그림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과 서예에도 능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다 時俗과 맞지 않는 특이한 言行과 해학(諧謔)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三絶→畵絶·才絶·痴絶]이라고 불렀다. 痴絶(치절)은 그의 독특한 기행(奇行)과 유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사탕수수를 즐겨 먹었는데 늘 가느다란 가지부터 먼저 씹어 먹었다. 사실 사탕수수는 뿌리 부분으로 내려갈수록 단 맛이 더한 법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묻자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점점 갈수록 단맛이 나기 때문이지(漸入佳境)."

이 때부터 漸入街境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을 뜻하게 됐다. 줄여서 街境(가경)이라고도 한다.

정구건즐[ 井 臼 巾櫛 ] ( 우물 정/ 절구 구/ 수건 건/ 빗 즐 ) 물 긷고 절구질하고 수건과 빗을 받드는 일이라는 뜻으로 아내나 가정주부로서 하여야 할 일.

정문금추[ 頂 門 金 椎 ] ( 정수리 정/ 문 문/ 쇠 금/ 쇠뭉치 추 ) : 쇠망치로 정수리를 두들긴다는 뜻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도록 깨우침을 이르는 말.

정문일침(頂 門 一 鍼) : (정수리 정/ 문 문/ 한 일/ 침 침 ) : 간절하고 따끈한 충고. 정수리에 침을 놓다. 핵심을 찌르는 충고를 하다.

정서이견[ 情 恕 理 遣 ] ( 뜻 정/ 용서할 서/ 다스릴 이/ 보낼 견 ) : 잘못이 있으면 온정으로 참고 이치에 비추어 용서함.

정설불식[ 井 渫 不 食 ]( 우물 정/ 파낼 설/ 아니 불/ 먹을 식 ) : 아무리 우물을 깨끗하게 해 놓아도 남이 먹지 않으려 하면 어쩔 수 없다.

정신 (挺 身)

[挺:뺄 정, 身:몸 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다. 곧 어려운 사정에 처했을 때 앞장서서 그 곤란에 대처한다.

태평양전쟁 때 日帝(일제)는 전선에 배치하여 일본군의 性的(성적) 노리개로 삼은 군대위안부들에게 가증스럽게도 挺身隊(정신대)란 허울좋은 이름을 붙였다.

唐(당)나라 高祖(고조) 李淵(이연)이 隋(수)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했지만 통일의 축배를 들기도 전에 후계자 싸움은 極(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싸움의 주인공은 고조의 세 아들 建成(건성), 世民(세민), 元吉(원길).

맏아들 건성은 이미 황태자로 봉해져 있었지만 당나라 창건과 안정에 크게 공헌한 둘째 아들 세민의 존재가 너무나 두드러졌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가 심각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셋째 아들 원길도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용맹이 뛰어난 원길은 그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자신이 帝位(제위)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세민을 없애야 한다. 세민이 없어지면 건성은 도마위의 생선과 다를 바 없으므로 그 다음은 자기 차지라고 믿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건성과 원길이 결탁해서 세민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세민은 선수를 쳐 건성과 원길을 살해하고 말았다. 이때 현무문에서 벌어진 건성과 원길의 부하들과 세민의 부하들이 벌인 싸움에서 세민의 장수 敬君弘(경군홍)의 奮鬪相(분투상)은 실로 눈부셨다. '舊唐書 敬君弘傳(구당서 경군홍전)'은 이렇게 적고 있다.

"군홍은 앞장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君弘挺身出戰·군홍정신출전)' 현무문의 變(변)이 있은지 2개월 뒤 고조는 퇴위하고 세민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국 역사상 걸출한 황제로 꼽히는 唐太宗(당태종)이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한국사키워드)

임진왜란 중 회의교섭의 결렬로 1597년(선조30)에 일어난 2차 임란.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원병과 권율 등의 반격으로 일단 화의가 설립되었으나, 정유년인 1597년에 일본군이 재침한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4만 대군으로 재침공하고, 이어서 고나시 유키니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침입해왔다. 이들이 이순신이 두려운 나머지 간첩을 침투시켜 그를 모함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이순신은 원균을 옹호하는 일파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히기도 했다. 일본의 대군이 침공하자 명나라에서도 다시 원군을 급파했고, 전쟁중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은 도망가는 적함 200척을 노량에서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친다. 7년 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 명, 일본국에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황폐화되고 도탄에 빠졌다.

정이불박(精 而 不 博)

[ 쓿은 쌀 정/ 말이름 이/ 아닐 불/ 넓을 박 ] :정밀하기는 하지만 널리 알지는 못함.

정저지와(井 底 之 蛙 )

[ 우물 정/ 밑 저/ 갈 지/ 개구리 와 ] : 우물 안 개구리. 견문(見聞)이 좁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경우, 또는 그러한 사람을 이르는 말.

정중지와[ 井 中 之 蛙 ]

[井:우물 정. 中:가운데 중. 之:어조사 지(…의). 蛙:개구리 와]

[동의어] 정저지와(井底之蛙), 좌정관천(坐井觀天)

우물 안 개구리라는 뜻으로, 식견이 좁음의 비유.

① '정중지와'란 말은《장자(莊子)》〈추수편(秋水篇)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황하(黃河)의 하신(河神)인 하백(河伯)이 흐름을 따라 처음으로 바다에 나와 북해에 까지 가서 동해를 바라보면서, 끝없는 넓음에 놀라서 북해(北海)의 해신(海神)인 약(若)에게 말했다. 그러자 북해의 신인 약이 이렇게 말했다.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를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井中之蛙 不知大海)은 그들이 좁은 장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말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여름만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식견이 좁은 사람에게는 도(道)를 말해도 알지 못하거니와, 그것은 그들이 상식의 가르침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지금 좁은 개울에서 나와 큰 바다를 바라보고 자기의 추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제 더불어 큰 진리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②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신(新)나라 말경, 마원(馬援)이란 인재가 있었다. 그는 관리가 된 세 형과는 달리 고향에서 조상의 묘를 지키다가 농서[ 西:감숙성(甘肅省)]에 웅거하는 외효의 부하가 되었다.

그 무렵, 공손술(公孫述)은 촉(蜀) 땅에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외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원을 보냈다. 마원은 고향 친구인 공순술이 반가이 맞아 주리라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공손술은 계단 아래 무장한 군사들을 도열시켜 놓고 위압적인 자세로 마원을 맞았다. 그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옛 우정을 생각해서 자네를 장군에 임명할까 하는데, 어떤가?"

마원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천하의 자웅(雌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공손술은 예를 다하여 천하의 인재를 맞으려 하지 않고 허세만 부리고 있구나. 이런 자가 어찌 천하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

마원은 서둘러 돌아와서 외효에게 고했다.

"공손술은 좁은 촉 땅에서 으스대는 재주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井中之蛙]'였습니다."

그래서 외효는 공손술과 손잡을 생각을 버리고 훗날 후한(後漢)의 시조가 된 광무제(光武帝:25∼27)와 수호(修好)하게 되었다.

제궤의혈[ 堤 潰 蟻 穴 ]

[堤:방죽 제. 潰:무너질 궤. 蟻 :개미 의. 穴: 구멍 혈]

개미구멍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큰 둑이 무너진다는 뜻. 곧 사소한 결함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곧 손쓰지 않으면 큰 재난을 당하게 된다는 말

상고(上古)시대 우(禹)임금은 도로의 건설 등 개척 사업에 힘을 기울였는데 특히 치수(治水) 사업을 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국시대 초기 홍수를 예방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 위(魏)나라 재상 백규(白圭)는 스스로 자기의 공적이 우임금을 능가할 것이라고 큰소리치곤 했다.

'한비자(韓非子)'를 쓴 韓非도 "백규가 수재를 막은 것은 둑의 구멍을 막은 것(白圭之行堤也 塞其穴)"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백규의 홍수 대책은 둑을 쌓고 둑에 생기는 구멍을 막는 것이었다. 둑을 아무리 튼튼하게 쌓는다 해도 시간이 가면서 조그만 구멍이 생기게 마련인데 백규는 그걸 찾아내게 해 제때에 틀어 막았다. 그는 개미구멍이라도 찾아내면 지체하지 않고 막아버렸다.이렇게 철저히 둑을 감시한 덕분에 백규가 재상으로 있는 동안 위나라는 한번도 수재(水災)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재난이란 방심(放心)과 사소한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게 마련.

'한비자'에도 "천길 제방은 땅강아지와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지고 백척 높은 집도 조그마한 연기구멍 때문에 타버린다(千丈之堤 以루蟻之穴潰 百尺之室 以突隙之烟焚)고 적혀있다. <※루(벌레충+婁):땅강아지루>

'한비자'에서 비롯된 堤潰蟻穴이란 말은 삼국시대 위나라 사람인 응거의 시에도 "작은 구멍이라 해서 어찌 삼가지 않으리. 제방도 개미 구멍 때문에 무너지는데(細微可不愼 堤潰自蟻穴)"라고 나온다.

개미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린다는 건 과장이 아니다. 온몸으로 밤새워 틀어막았다는 네덜란드 소년의 실화에 나오는 제방의 구멍도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제갈동지[ 諸 葛 同 知 ] ( 모두 제/ 칡 갈/ 한가지 동/ 알 지 ) : 제가 스스로 가로되 동지라 한다는 뜻(건방지며 지체는 낮은 사람을 농으로 가리키는 말)

제마멸사[ 制 魔 滅 邪 ] ( 절제할 제/ 마귀 마/ 멸할 멸/ 간사할 사 ) : 마귀를 억누르고 사악함을 멸하는 것.

제세지재[ 濟 世 之 才 ] ( 건널 제/ 인간 세/ 갈 지/ 재부 재 ) : 세상을 구제할 만한 뛰어난 인물

제하분주[ 濟 河 焚 舟] ( 건널 제/ 강이름 하/ 불사를 분/ 배 주 ) : 적을 공격하러 가면서 배를 타고 물을 건넌 후 바로 배를 태워버린다. 必死의 뜻을 나타내는 말.

제행무상[ 諸 行 無 常 ] ( 모든 제/ 갈 행/ 없을 무/ 항상 상 ) : 인생의 덧없음. 우주의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서 같은 모습으로 꽉 정돈하여 있지 아니함.

조강지처(糟 糠 之 妻)

[糟:술재강 조. 糠:겨 강. 之:갈 지(…의). 妻:아내 처]

[원말] 조강지처 불하당(糟糠之妻不下堂).

술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

전한(前漢)을 찬탈한 왕망(王莽)을 멸하고 유씨(劉氏) 천하를 재흥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일이다. 건원(建元) 2년(26), 당시 감찰(監察)을 맡아보던 대사공(大司空:御史大夫) 송홍(宋弘)은 온후한 사람이었으나 간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어느 날, 광무제는 미망인이 된 누나인 호양공주(湖陽公主)를 불러 신하 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그 의중을 떠보았다. 그 결과 호양 공주는 당당한 풍채와 덕성을 지닌 송홍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광무제는 호양공주를 병풍 뒤에 앉혀 놓고 송홍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이런 질문을 했다.

"흔히들 고귀해지면 (천할 때의) 친구를 바꾸고, 부유해지면 (가난할 때의) 아내를 버린다고 하던데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소?"

그러자 송홍은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 황공하오나 신은 '가난하고 천할 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 하며[貧賤之交 不可忘],

술재강과 겨로 끼니를 이을 만큼 구차할 때 함께 고생하던 아내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들었사온데 이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되나이다."

이 말을 들은 광무제와 호양 공주는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물론 송홍에게는 조강지처(糟糠之妻)가 있어 송홍은 이를 존중한 것이며, 광무제도 그 조강지처를 억지로 내쫓고서 누나의 희망을 채워 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조(糟)는 술지게미를 뜻하고, 강(糠)은 쌀겨를 뜻하며 몹시 거친 음식을 말한다. 조강지처는 이와 같이 거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온갖 고생을 함께 한 아내라는 뜻이다.

조령모개(朝 令 暮 改)

[아침 朝 명령할 令 저물 暮 고칠 改]

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다시 고쳐 내린다. 곧 법령이나 명령을 자주 바꾸는 것을 빗댄 말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수시로 邊境(변경)을 침략해 오는 匈奴(흉노)라는 북방 민족 때문에 여간 골치를 썩인 게 아니었다. 바람처럼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게 그들의 長技(장기)였다. 흉노는 周(주)나라 이래 약 2천년 동안 중국을 괴롭혔다.

前漢(전한) 文帝(문제)때도 북방 변경 백성들이 흉노의 약탈로 시달림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변경수비라는 兵役(병역)의 의무까지 지고 있었다.

문제(文帝)는 중국의 역사상 검소하기로 이름난 황제였다. 그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감세오 감형을 베풀었으며, 조정에서는 노략질 당해 식량이 부족해진 이 변경 백성들에게 갖다 줄 식량을 거두어들이는 자와 식량 수송을 맡은 자에게는 격에 어울리지 않는 높은 벼슬까지 주어 독려했다. 변경 백성에 대한 이런 배려는 하남성의 동부 태생이었던 조착(曹錯)이라는 중신의 獻策(헌책)에 따른 것인데 이 헌책을 상소한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다섯 명 가족의 농가에서는 賦役(부역)이 너무 무거워 부역에 따르는 자가 두 명도 채 되지 않습니다. 경작지도 3천평이 고작이어서 여기서 나는 수확도 보잘 것 없습니다. 그들은 부역에 징발되어 春夏秋冬(춘하추동) 쉴 날이 없습니다. 또 개인적으로는 손님을 맞이하고 죽은 자를 조문하고 병자를 위문하는 등 일이 많습니다. 게다가 홍수와 가뭄에 시달리고 또 갑자기 조세와 부역을 강요당합니다. 조세와 부역은 일정한 시기도 없이 아침에 명령이 내려오면 저녁에는 또 다른 명령이 고쳐 내려옵니다(朝令而暮改). 이래서 논밭과 집을 내놓고 아들과 손자를 팔아 빚을 갚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재위 23년(기원전 157년) 46세의 나이로 죽고 뒤이어 경제(景帝)가 보위에 올랐다. 문제와 경제는 '백성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정책을 40년 가까이 실시하였기 때문에 사회 안정을 꾀하였다. 이 두 시대를 역사에서는 '문경지치(文景之治:기원전 179~141)'라 부른다.

조로지위(朝露之危)

[朝:아침 조. 露:이슬 로. 之:어조사 지. 危:위태로울 위]

아침 이슬처럼 매우 위험함. 생명이나 지위가 아주 불확실하여 매위 위급한 상태에 있음을 말함

공손앙(公孫앙:상앙)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형사 법령(刑事法令)를 연구했으며, 성장하여 위(魏)나라의 재상 공숙좌(公叔座)를 섬겨, 그 재간을 높이 인정 받았다. 그 후 중병에 걸린 공숙좌는 위나라의 혜왕(惠王)에게 진언했다.

"상앙은 드물게 보는 인재니, 중용하여 정무를 맡겨야 합니다. 만일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시겠다면 죽여 버리십시오. 결코 남의 나라에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나간 뒤에 그는 상앙을 불러 왕과의 대화를 전하고, 어서 달아나라고 권했다.

"왕은 어차피 재상의 말을 안 들을 겁니다."

상앙은 이렇게 말하며 웃고는 출국하지 않았다. 과연 왕은 그를 체포하지 않았고, 의지하던 공숙좌도 작고했다. 마침 진(秦)나라의 효공(孝公)이 인재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진나라에 갔다.

효공을 세 번 알현한 상앙은 세 번째 알현 때 법 개정의 필요를 설득해 그의 마음을 끌었다. 효공은 그를 좌서장(左庶長)으로 등용해 실행시키기로 했다.

상앙은 백성이 신용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법령 공포에 앞서 도성의 남문에 막대기를 세우고, '북문으로 옮기면 10금을 주겠노라'고 고시했다. 이른바 이목지신(移木之信)의 故事다. 새 법을 시행한지 10년, 진나라는 부강해지고 군대는 강해졌다. 상앙은 상(商)과 어(於) 땅을 하사받아 상군(商君)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법의 엄정한 적용 때문에 귀족이나 대신의 원망을 샀다.

어느 때 조양(趙良)이라는 사람이 상앙에게 충고했다.

"당신은 지금 아침이슬처럼 위험합니다(朝露之危). 이대로 가다간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쭐해진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기원전 338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다. 혜문왕(惠文王)이다. 상앙에게 불만이 있던 대신들은 "상앙에게 모반할 마음이 있다"고 왕에게 무고했다. 그는 위(魏)나라로 달아났다. 하지만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위나라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진나라로 되돌아간 그는 체포되어 죽었다.

조명시리[ 朝 名 市 利 ]

[朝:아침(조정) 조. 名:이름 명. 市:저자 시. 利:이로울 리].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市場]에서 다투라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적당한 장소에서 행하라는 말.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 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는 어전에서 '촉(蜀)의 오랑캐를 정벌하면 국토도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도 쌓일 것이므로, 이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라며 촉으로의 출병을 주장했다.

그러나 종횡가(縱橫家) 출신의 재상 장의(張儀)는 그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진나라는 우선 위(魏) 초(楚) 두 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고, 한(韓)나라의 삼천(三川) 지방으로 출병한 후 천하의 종실인 주(周)나라의 외곽을 위협하면, 주나라는 스스로 구정[九鼎:천자(天子)를 상징하는 보물]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그 보물을 내놓을 것이옵니다. 그때 천자를 끼고 천하에 호령하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나이까? 이것이 패업( 業)이라는 것이옵니다. 그까짓 변경의 촉을 정벌해 봤자 군사와 백성을 피폐(疲弊)케 할 뿐 무슨 명리(名利)가 있겠나이까?

신(臣)이 듣기로는 '명성은 조정에서 다투고 이익은 저자에서 다툰다[朝名市利]'고 하옵니다. 지금 삼천 지방은 천하의 저자이옵고 주나라 황실(皇室)은 천하의 조정이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이것을 다투려 하지 않고 하찮은 오랑캐의 촉을 다투려 하시옵니다. 혹, 패업을 멀리 하시려는 것은 아니옵나이까?"

그러나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주] 장의 : 전국 시대 말엽의 종횡가. 위(魏)나라 사람.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겸임했던 소진(蘇秦)과 함께 수수께끼의 종횡가인 귀곡 선생(鬼谷先生)에게 종횡의 술책을 배움. 위나라의 재상으로 있다가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임을 받아 진나라의 재상이 됨. 소진이 제(齊)나라에서 살해되자(B.C. 317) 6국을 순방, 유세(遊說)하여 소진의 합종책을 깨고 연횡책을 성사시켜 6국으로 하여금 개별적으로 진나라를 섬기게 함. 혜문왕이 죽은 후 참소(讒訴)를 당하여 위나라에서 객사(客死)함.

조문석사[ 朝 聞 夕 死 ] ( 아침 조/ 들을 문/ 저녁 석/ 죽을 사 ) ;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짧은 인생을 값지게 살아야 한다.

조변석개(朝 變 夕 改 )

[ 아침 조/ 변할 변/ 저젹 석/ 개칠 개 ] : 아침 저녁으로 뜯어 고침. 곧, 일을 자주 뜯어고침.

조삼모사 (朝 三 募 四)

[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라는 뜻. 곧 ① 당장 눈앞의 차별만을 알고 그 결과가 같음을 모름의 비유. ②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여 희롱함을 이르는 말.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저(狙)란 원숭이를 뜻한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저공은 많은 원숭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가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좋아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저공을 따랐고 마음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워낙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를 대는 일이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저공은 원숭이에게 나누어 줄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그는 우선 원숭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는 도토리를 앞으로는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하나같이 화를 냈다. '아침에 도토리 세 개로는 배가 고프다'는 불만임을 안 저공은 '됐다' 싶어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朝四暮三]씩 주마."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한다. 조삼모사나 朝四暮三이나 합쳐보면 하루에 도토리 일곱 개씩으로 두 경우 똑같은데 원숭이들은 아침의 먹이가 세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는데 만족한 것이다.

조장 (助 長)

도울 조, 길 장

도와서 자라나게 한다는 뜻이지만 조급히 키우려고 무리하게 힘들여 오히려 망친다는 경계의 뜻을 지닌 말

맹자가 제자인 공손추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호연지기(浩然之氣)란 말이 나왔다. 맹자는 호연지기에 대해 설명하고 기를 기르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호연지기를 기르는데 있어서 첫째 유념해야 할 것은 그 행하는 것이 모두 道義에 맞아야 한다. 氣만을 목적으로 해서 길러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養氣의 방법을 전혀 잊어버리는 것도 좋지 않다. 宋나라의 어떤 사람처럼 너무 서둘러 무리하게 조장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맹자는 여기서 재미있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송나라의 어떤 농부가 모를 심었는데 그 모가 좀처럼 잘 자라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빨리 자랄까 하고 궁리한 끝에 손으로 뻗게 해주기로 했다. 그래서 모를 하나씩 뽑아서 늘여주었다. 그 많은 모를 하나 하나 뽑아 늘이자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녹초가 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 말했다.

"아, 피곤해. 모가 하도 작아서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助長) 왔지"

집안 사람들이 놀라 논으로 뛰어 가봤더니 모가 전부 말라 죽어 있었다.

"처음부터 기를 기르는 것은 쓸데 없는 것이라고 내버려두는 것도, 그렇다고 기는 길러야 하는 것이라 믿고 그 성장을 조장하는 것도 모두 좋지 않다." 이것이 맹자의 결론이었다.

조진모초 (朝 秦 暮 楚) : 아침은 북방 진나라에서 저녁은 서방 초나라에서 거처한다는 뜻 (정처없이 사는것)

조탁복박(雕 琢 復 朴)

<장자>에 보면 화려한 허례와 외관을 부숴버리고. 본래의 소박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조탁복박이라..!

깍을 조에 쪼을 탁자, 조탁, 화려한 꾸밈을 과감하게 깎아버리고, 돌아갈 복자에 순박할 박자, 복박, 순박함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입니다.

장자 내편 <응제학> 편에 나오는 이 말은. 너무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꾸미거나 수식하지 말고 본래의 내 모습을 소중히 여기며. 참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기업의 리더는. 去華取實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고 합니다.

화려한 수식을 버리고 참된 진실을 추구하자는 것인데요, 화려한 수식과 꾸밈으로만 인정받으려는 요즘, 꾸며진 겉모습을 과감하게 부수고 순순한 나를 회복하자고 하는. 조탁복박의 철학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조화무궁(造 化 無 窮) : 온 세상 만물은 낳고 자라게 하고 죽게 하는 대자연의 이치는 끝이 없음

족탈불급[ 足 脫 不 及 ] ( 발 족/ 벗을 탈/ 아닐 불/ 미칠 급 ) :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능력이나 재질·역량 따위가 뚜렷한 차이가 있음.

존망지추(存亡之秋)

[存:있을 존. 亡:망할 망. 之:어조사 지. 秋:가을 추]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의 중요한 때. 절박한 위기를 비유하는 말

秋(가을)는 수확기라는 뜻에서 중요한 때를 가리킨다.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촉한(蜀漢)의 재상이 된 제갈량은 비상한 능력을 발휘해 보잘 것 없던 촉한을 일으켜 세워 위(魏) 오(吳)와 정립(鼎立)하는 삼국시대를 만들어낸다.

세월이 흘러 유비가 63세로 죽고 태자 유선(劉禪)이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유선은 17세의 어린 나이로 자질이 부족한데다 관우와 장비도 이미 죽은 촉한의 운명은 이제 제갈량의 두 어깨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제갈량은 전군을 이끌고 위나라 토벌에 나섰다. 출정에 앞서 그는 후주(後主) 유선에게 글을 올렸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前出師表>다. 이 출사표는 제갈량이 그의 충성심을 토로한 명문장인데 그 첫대목은 이렇게 되어있다.

"선제(先帝·유비)께오서 창업을 이루시다가 중도에 돌아가시고 바야흐로 천하는 셋으로 나뉘었고 우리 익주(益州·촉한을 가리킴)는 피폐해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시기'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조 今天下三分 益州罷蔽 此誠危急'存亡之秋'也)"

그러나 제갈량은 위나라와의 결전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다음해 다시 원정길에 올랐으나 오장원(五丈原)의 진중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촉한은 그 뒤 몇 년을 버티다가 견디지 못하고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멸망한 나라가 되었다.

종남첩경[ 終 南 捷 徑 ]

[끝 종, 남녘 남, 빠를 첩, 지름길 경]

출세(出世)와 영달(榮達)의 지름길. 목적 달성의 지름길

과거(科擧)제도가 정착되어 있던 唐(당)나라에서는 과거급제가 곧 벼슬길로 들 수 있는 자격증을 따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경쟁의 치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과거에 급제했다고 해서 바로 임용되는 것은 아니고 원하는 자리에 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출세의 길로 들어선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 아니었다.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盧藏用(노장용)도 쉽게 임용되지 않아 몹시 초조해 했다. 실의(失意)의 나날을 보내던 그의 머리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終南山(종남산)에 들어가 틀어박히는 것이었다. 수도 長安(장안) 서남쪽에 있는 종남산에는 학문과 자기 수련만을 추구할 뿐 세속적인 영달에는 초연한 선비들이 隱居(은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敬慕(경모)했다.

은거한 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자 노장용의 명성은 조정의 관심을 끌게 되어 마침내 左拾遺(좌습유)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그의 작전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은 것이었다.

당시 종남산에는 司馬承幀(사마승정)이라는 진짜 賢人(현인)이 은거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하산하여 관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가 어느날 장안에 왔다가 돌아갈 때 성 밖까지 배웅한 사람은 노장용이었다. 그는 멀리 보이는 종남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종남산은 참으로 영험이 있는 산이지요."

그러자 사마승정은 이렇게 대꾸했다.

"내가 보기에는 벼슬길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오(以僕視之 仕宦之捷徑耳)."

노장용은 머쓱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종남산이 벼슬길로 가는 지름길이듯 이 땅에선 출신지역과 출신고교가 출세와 영달의 지름길일 수도 있었다.

종두지미[ 從 頭 至 尾 ] ( 좇을 종/ 머리 두/ 이를 지/ 꼬리 미 ) : 머리부터 꼬리까지, 즉 처음부터 끝까지.

종선여등[ 從 善 如 登 ] ( 좇을 종/ 착할 선/ 같을 여/ 오를 등 ) : 착한 일을 쫓아 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말.

종선여류[ 從 善 如 流 ]

[從:따를 종. 善:좋을(착할) 선. 如:같을 여. 流 ;흐를 류]

선을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한다. 물이 신속히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선(善)임을 알았으면 지체 없이 이에 따른다.

춘추시대 후기 초(楚)나라는 차츰 강대해져 끊임없이 주위의 작은 나라를 병탄했다. 기원전 585년 초나라가 정(鄭)나라에 진격해 정나라는 크게 패했다. 당시 정나라와 진(晉)나라는 우호관계에 있었고, 진나라는 강국이었다. 정나라의 패전 소식을 들은 진나라 경공(景公)은 대신 난서에게 명해 대군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원하러 가게 했다.

초나라 군사는 진나라 군사의 병력이 압도적으로 강한 것을 보고 대전은 무리라고 판단해 군대를 철수시켰다. 초나라 군사와 결전할 기회를 놓친 진나라의 난서는 내친 김에 초나라의 동맹국인 채(蔡)나라를 공격했다. 채나라는 진나라의 적수가 못 되었다.

채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초나라는 동맹의 우의를 존중해 채나라에 군대를 파견했다.

초나라의 군사가 공격해 온다는 것을 안 진나라 군사는 대장 조동(趙同)과 조괄(趙括)이 총사령관인 난서에게 즉시 출격을 요청했다. 이에 난서가 동의하자, 부하인 지(知)·범(范)·한(韓) 세 사람이 반대했다.

"안 됩니다. 이기더라도 상대는 초나라 군사의 일부에 불과하니, 큰 명예는 되지 않습니다. 만일 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큰 수치입니다."

난서는 이 말을 지당하다고 여기고 군사를 철수하자고 명령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자가 있어 말했다.

"원수는 11명의 장교 중 겨우 세 사람의 의견을 따르신다는 말인가"

"비록 소수의 의견일지라도, 올바른 것이라면 따라야 한다. 저 사람은 현자니 그 말에 틀림이 없다."

이리하여 진나라 군사는 초나라 군사와의 유혈을 피할 수가 있었다. 2년 후, 난서는 초나라가 방심한 틈을 타 채나라와 심(沈)나라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칭찬했다.

"난서는 종선여류(從善如流)다. 정말 위대하다."

종심소욕[ 從 心 所 欲 ] ( 좇을 종/ 마음 심/ 바 소/ 하고자 할 욕 ) :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함.

종용유상[ 從 容 有 常 ]

[쫓을 종, 얼굴 용, 있을 유, 항상 상]

안색, 행동 등을 바꾸지 않고 소신대로 행함

순수 우리말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한자어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흐지부지'(諱之非之·휘지비지)장난(作亂), 야단법석(惹端法席), 우악(愚惡)등이 그렇다.떠들지 않고 소리없이 얌전한 것을 「조용」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한자 「종용」從容)에서 나왔다.직역하면「얼굴에 따른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君子가 喜怒哀樂(희노애락)의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는 것은 금물이었다.얼굴은 인격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므로 늘 변치 않는 안색을 지녀야 했다.그러기 위해서 안색은 늘 움직임이 없는「조용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유상(有常)은 무상(無常)의 반대로 늘 변치 않는 상도(常道)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그러니까 종용유상(從容有常)이란 외부의 어떠한 상황에도 안색과 행동을 바꾸지 않고 평소의 소신에 따라 정도(正道)를 걷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예기(禮記)』에 나오는 孔子의 말이다.

그는 지도자의 태도가 그래야 한다고 보았다.行動擧止(행동거지)가 항상 조용하고(從容)법도에 벗어나서는 안되며(有常), 심지어는 옷도 자주 바뀌어서는 안된다고 했다.그래야만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백성 또한 그의 덕에 감화 받아 불변의 충성심을 보인다는 것이다.그러고 보면 종용유상(從容有常)은 우리 모두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좌고우면( 左 顧 右 眄 )

[ 왼 좌/ 돌아볼 고/ 오른쪽 우/ 애꾸눈 면 ] : 왼쪽으로 돌아보고 오른쪽으로 돌아본다는 데서, 이쪽저쪽 돌아보는 것을 말함. 주위의 사람을 염려하여 결단(決 斷 )을 망설임.

좌 단(左袒)

[左:왼 좌. 袒:옷 벗어 멜 단.]

웃옷의 왼쪽 어깨를 벗는다는 뜻으로, 남에게 편들어 동의함을 이르는 말.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의 황후인 여태후(呂太后)가 죽자(B.C. 180) 이제까지 그녀의 위세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유씨(劉氏) 일족과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 고조의 유신(遺臣)들은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한 조왕(趙王) 여록(呂祿), 남군(南軍)을 장악한 여왕(呂王) 여산(呂産)을 비롯한 외척 여씨(呂氏) 타도에 나섰다.

그간 주색에 빠진 양 가장했던 우승상(右丞相) 진평은 태위(太尉) 주발과 상의하여 우선 여록으로부터 상장군의 인수(印綬)를 회수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기( 寄)가 여록과 친한 사이임을 안 진평은 그를 여록에게 보냈다. 역기는 여록을 찾아가 황제의 뜻이라 속이고 상장군의 인수를 회수해 왔다. 그러자 주발은 즉시 북군의 병사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원래 한실(漢室)의 주인은 유씨이다. 그런데 무엄하게도 여씨가 유씨를 누르고 실권을 장악하고 있으니 이는 한실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나 상장군 주발은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여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우단(右袒)하고, 나와 함께 유씨에게 충성하려는 자는 좌단(左袒)하라."

그러자 전군(全軍)은 모두 좌단하고 유씨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병사들은 이때부터 일어나 여씨 일족을 척살해 나갔다. 이 와중에서 번쾌의 아내였던 여수도 매를 맞아 죽었고, 그의 아들 번항까기 죽은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렇듯 여씨 일족에 대한 주변이 정리되자, 주발은 고조의 아들 유항(劉恒)을 맞아 보위게 올렸다. 이가 문제(文帝)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유방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었다.

"유씨를 편안케 할 자는 주발이다."

그 예언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천하는 다시 유씨에게로 돌아갔다.

좌불수당[ 坐 不 垂 堂 ( 앉을 좌/ 아닐 불/ 드리울 수/ 집 당 ) : 마루 끝에 앉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앉지 않는다. 위험한 일에 가까이 하지 않음을 뜻한다.

좌식산공[ 坐 食 山 空 ] ( 앉을 좌/ 밥 식/ 뫼 산/ 빌 공 ) : 아무리 산더미같이 많은 재산도 벌지 않고 놀고 먹기만 하면 끝내는 다 없어진다는 말.

좌우명(座 右 銘)

[座:자리 좌, 右:오른 우, 銘:새길 명]

항상 옆에 두고 반성의 자료로 삼는 격언이나 경구

座右銘(좌우명)이란 자리 오른쪽에 붙여 놓고 반성의 자료로 삼는 格言(격언)이나 警句(경구)를 말한다. 그러나 원래는 文章이 아니라 술독을 사용했다고 한다. 齊(제)나라는 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하나였던 桓公(환공)이 죽자 廟堂(묘당)을 세우고 각종 祭器(제기)를 진열해 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상한 술독이었다. 텅 비어있을 때는 기울어져 있다가도 술을 반쯤 담으면 바로 섰다가 가득 채우면 다시 엎어지는 술독이었다. 하루는 孔子가 제자들과 함께 그 廟堂을 찾았는데 博識(박식)했던 孔子도 그 술독만은 알아볼 수 없었다. 담당 관리에게 듣고 나서 그는 무릎을 쳤다.

『아! 저것이 그 옛날 齊桓公(제환공)이 의자 오른쪽에 두고 가득 차는 것을 경계했던 바로 그 술독이로구나!』 그는 弟子들에게 물을 길어와 그 술독을 채워보도록 했다. 과연 비스듬히 세워져 있던 술독이 물이 차오름에 따라 바로 서더니만 나중에는 다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孔子가 말했다.

『공부도 이와 같은 것이다. 다 배웠다고(가득 찼다고) 교만을 부리는 자는 반드시 화를 당하게 되는 법이니라. 』 집에 돌아온 그는 똑같은 술독을 만들어 의자 오른쪽에 두고는 스스로를 가다듬었다고 한다.

좌정관천(坐 井 觀 天 )

[ 앉을 좌/ 우뮬 정/ 볼 관/ 하늘 천 ] :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본다는 뜻으로, 견문(見 聞 )이 좁아 세상 물정을 너무 모름을 말함.

종선여류[ 從 善 如 流 ] ( 좇을 종/ 착할 선/ 같을 여/ 흐를 류 ) : 善을 쫓는 태도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서슴지 않음. (서슴지 않고 착한 일을 하는 태도를 말한다.)

주공삼태(周公三笞)

[周:두루 주. 公:공변될 공. 三:석 삼. 笞:매질할 태]

주공의 세 차례 매질이라는 뜻으로, 자식들을 엄하게 교육시키는 것

백금(伯禽)과 강숙봉(康叔封)이 성왕(成王)을 알현하고 주공(周公)을 만났다. 이들은 주공을 세 차례 만났는데, 그때마다 주공에게 심하게 매질을 당하였다. 강숙봉이 하얗게 놀란 얼굴로 백금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토록 엄하게 하시는지, 상자(商子)라는 현명한 자가 있다니, 그를 만나 물어 봅시다."

강숙봉과 백금은 상자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저희 둘이 성왕을 알현하고 주공을 세 번 뵌 일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무슨 영문인지 저희에게 심한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두 분은 남산 저쪽에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가면 '교(橋)'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지요."

두 사람은 남산 남쪽으로 가서 '교'라는 나무를 보았다. 가지들이 위쪽으로 쭉쭉 뻗어 높이 솟아 있었다.

돌아와서 상자에게 그 나무의 모습에 대해 말하니 상자가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다시 남산 북쪽에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는 '재(梓)'라는 이름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남산 북쪽으로 가서 '재'라는 이름의 나무를 보았다. 그 나무는 반대로 낮게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상자가 말했다.

"'재'는 자식의 도리옵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주공을 찾아가서 문을 들어서는 순간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마루에 앉아 무릎을 꿇었다. 주공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음식을 주고 이렇게 말했다.

"어떤 군자를 만났느냐?"

"상자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허허, 군자로구나 상자여!"

여기서 교목(橋木)은 아버지의 도리이고, 재목(梓木)은 자식의 도리를 뜻한다. 엄한 교육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엄한 훈련과 교육을 받고 성장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생각과 행동이 올곧은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다.

주마가편(走 馬 加 鞭 )

[ 달릴 주/ 말 마/ 더할 가/ 째찍 편 ] :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더 빨리 달리게 함.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노력함. 정진(精進 쓿은 쌀 정, 나아갈 진)하는 사람을 더 한층 권장(勸奬 권할 장. 근면할 장)함.

주마간산( 走 馬 看 山 ) : 달리는 말에서 산을 봄. 대충 일을 넘어가다. 수박 겉 핥기.

주마등(走 馬 燈)

[달릴 주, 말 마, 등불 등]

사물이 덧없이 빨리 돌아감

中國 사람들만큼 등(燈)을 즐기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戰國時代(전국시대)부터 燈을 달았다고 하니 무려 2천5백년의 역사가 되는 셈이다.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면 으레 길거리에 등불부터 내건다. 대표적인 것이 정월 대보름의 觀燈(관등) 행사다. 中國은 周(주)나라 때부터 야간통금을 실시했다.그러다 보니 백성들이 겪는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통치자들은 백성들의 억압된 심리도 풀어주고 또 태평성대를 과시하기 위해 명절만큼은 通禁(통금)을 해제하고 휘황찬란한 燈을 宮城(궁성) 주위에 내걸게 했다. 이때부터 차츰 燈을 거는 기간도 늘어나 明 太祖 朱元璋(주원장)은 10일간이나 걸게 했으며, 지금은 설부터 대보름까지 무려 15일간을 걸어둔다.

이 날 등장하는 燈의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각종 과일과 꽃·물고기 등…….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역시 走馬燈(주마등)이 아닐까 싶다.燈 위에 둥근 原盤(원반)을 올려놓고 原盤의 가장자리를 따라 말이 달리는 그림을 붙여 늘어뜨린다.마치 영화의 필름처럼 연속동작의 그림을 붙여 놓는 것이다. 밑에서 촛불을 밝히면 燈 내부의 공기가 對流 現狀(대류현상)을 일으켜 원반을 돌게 한다. 촛불의 밝기에 따라 회전속도도 빨라짐은 물론이다. 원반이 돌아가면 마치 만화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말이 疾走(질주)하는 모습이 연속동작으로 눈에 들어 오게 된다. 그것이 走馬燈이다. 워낙 빨리 돌았으므로 走馬燈은 세월의 빠름이나 어떤 사물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을 형용하기도 한다.「마치 走馬燈처럼 스쳐 지나갔다」는 표현이 있다.

주지육림( 酒 池 肉 林)

[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

술로 못[池]을 이루고 고기로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주연(酒宴)을 말함

고대 중국의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은(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매희(妹喜), 달기라는 희대의 요녀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 사치와 주색에 탐닉하다가 결국 폭군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하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매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기도 했다.

또 무악에 싫증이 난 매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뭇 둘레에는 고기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매희는 그 못에 호화선은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워했다.

이 같은 사치음일(奢侈淫佚)의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주벌(誅伐)당하고 말았다.

또한 은나라 마지막 군주인 주왕(탕왕으로부터 28대째)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 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의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 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을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惶惚境)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이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못해 충신들이 간하면 주왕은 도리어 그들을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불충자로 몰아 가차없이 포락지형(暑烙之刑)에 처하곤 했다. 포락지형이란 기름칠한 구리 기둥[銅柱]을 숯불 위에 걸쳐놓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일종의 잔인 무도한 사형 방법인데, 미끄러운 구리 기둥에서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은 희생자들의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까지도 잔인한 달기의 음욕(淫慾)을 돋우는 재료가 되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주(周)나라 시조인 무왕(武王)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죽마고우(竹馬故友)

[竹:대나무 죽. 馬:말 마. 故:옛 고. 友:벗 우]

어릴 때 같이 죽마(대말)를 타고 놀던 벗이란 뜻. 곧 ① 어렸을 때의 벗. 소꼽친구. ② 어렸을 때 친하게 사귄 사이. ③ 어렸을 때부터의 오랜 친구.

진(晉:東晉)나라 12대 황제인 간문제(簡文帝:371∼372) 때의 일이다. 촉(蜀) 땅을 평정하고 돌아온 환온(桓溫)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간문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殷浩)라는 은사(隱士)를 건무장군(建武將軍)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명했다. 그는 환온의 어릴 때 친구로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인재였다. 은호가 벼슬길에 나아가는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적이 되어 반목(反目)했다. 왕희지(王羲之)가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은호가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 중 하나인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이 죽고 호족(胡族)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중원 땅을 회복하기 위해 은호를 중원장군에 임명했다. 은호는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으나 도중에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결국 대패하고 돌아왔다. 환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은호를 규탄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그를 변방으로 귀양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환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은호는 나와 '어릴 때 같이 죽마를 타고 놀던 친구[竹馬故友]'였지만 내가 죽마를 버리면 은호가 늘 가져가곤 했지. 그러니 그가 내 밑에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환온이 끝까지 용서해 주지 않음으로 해서 은호는 결국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죽장망혜 [竹杖芒鞋]

(1)

대지팡이와 짚신이란 뜻으로, 먼길을 떠날 때의 아주 간편한 차림새를 이르는 말.

(2)

[음악] 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하여 부르는 단가의 하나. 중모리장단으로 부른다.

준조절충[ 樽 俎 折 衝 ]

[樽:술통 준. 俎:도마 조. 折:꺾을 절. 衝:충돌할 충.]

'술자리[樽俎(間)]에서 유연한 담소(談笑)로 적의 창끝을 꺾어 막는다[折衝]는 뜻으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일을 유리하게 담판짓는 것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이 신하인 최저(崔 )에게 시해되자 동생이 뒤를 잇고 경공(景公)이라 일컬었다. 경공은 최저를 좌상(左相)에 임명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는 죽이기로 맹세까지 했다. 이어 모든 신하가 맹세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영(晏孀:晏子)만은 맹세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고 한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좋으련만.'

이윽고 최저가 살해되자 경공은 안영을 상국(相國)에 임명했다. 안영은 온후박식(溫厚博識)한 인물로서 '한 벌의 호구(狐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가죽으로 만든 갖옷)를 30년이나 입었을[一狐 三十年]'정도로 검소한 청백리이기도 했다. 한 번은 경공이 큰 식읍(食邑)을 하사하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양했다고 한다.

"욕심이 충족되면 망할 날이 가까워지나이다."

당시 중국에는 대국만 해도 12개국이나 있었고 소국까지 세면 100개국이 넘었다. 안영은 이들 나라를 상대로 빈틈없이 외교 수완을 발휘하여 제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안영의 외교 수완에 대해 그의 언행을 수록한《안자 춘추(晏子春秋)》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술통과 도마 사이[樽俎間:술자리]를 나가지 아니하고 1000리(里) 밖에서 절충한다 함은, 그것은 안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 준조 사이 : '술통과 도마 사이'란 뜻으로, 술자리(연회석)를 가리키는 말.

줄탁동기 줄탁동시

중과부적( 衆 寡 不 敵 )

[衆:무리 중. 寡:적을 과. 不:아니 불. 敵:대적할 적]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

전국 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王道論)을 역설하던 맹자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말했다.

"전하 스스로는 방일(放逸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방탕하게 놂)한 생활을 하시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천하의 패권(覇權)을 잡으려 드시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사옵니다."

"아니, 과인의 행동이 그토록 터무니없고 심하다는 말이오?"

"심한 정도가 아닙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면 비록 물고기는 얻지 못하더라도 뒤따르는 재앙은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정책은 실패하면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가령, 지금 소국인 추(鄒)나라와 대국인 초(楚)나라가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기겠나이까?"

"그야, 물론 초나라가 이길 것이오."

"그렇다면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衆寡不敵]'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지금 천하에는 1000리(里) 사방(四方)의 나라가 아홉 개 있사온데 제나라도 그 중 하나이옵니다. 한 나라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결코 소국인 초나라가 대국인 초나라를 이기려 하는 것과 같지 않사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선왕의 물음에 맹자는 지론인 왕도론을 설파했다.

"전하께서는 그 근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 정치를 쇄신하고 인정(仁政)을 베푸시면 천하는 저절로 전하의 것이 됩니다. 왕도로써 백성을 열복(悅服)시킨다면 그들은 모두 전하의 덕에 기꺼이 굴복할 것이오며 또한 천하는 전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옵니다…‥."

중구난방 (衆 口 難 防)

[무리 중, 입 구, 어려울 난, 막을 방]

여러 사람의 말을 다 막기가 어렵다는 말로 많은 사람이 마구 떠들어대는 소리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뜻

周(주)나라 때 이야기다. 여왕은 국정을 비방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해서 죽였다. 그래서 밀고제도 자리잡고 거미줄같이 쳐진 정보망 때문에 백성들은 공포정치에 질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떻소. 내 정치하는 솜씨가. 나를 비방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지 않소"

여왕은 득의만만해서 그렇게 말했다. 중신 召公(소공)은 기가 막혔다.

"겨우 비방을 막은 것에 불과합니다. 백서의 입을 막는 것은 둑으로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물이 막히면 언젠가 둑을 무너드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됩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이 마음 놓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런 소공의 간곡한 충언을 여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공이 우려했던 대로 백성들은 언제까지나 가만있지는 않았다. 백성들은 마침내 들고 일어났다. 여왕이 달아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주나라에서는 14년간 共和政(공화정)이 실시되었다. 신하들이 상의해서 정치를 했기에 공화라 했던 것이다.

성을 쌓는 일을 독려하기 위해 나와 있던 춘추시대 송나라의 華元(화원)이란 벼슬아치가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사람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일꾼들이 일제히 그를 비웃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여왕의 故事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의 입을 막기 어렵다(衆口難防)]고 하고는 작업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구삭금[ 衆 口 鑠 金 ] ( 무리 중/ 입 구/ 녹일 삭/ 쇠 금 ) : 여러 사람이 합해 말하면 굳은 쇠도 녹인다.

중농주의 [ 重 農 主 義 ] ( 무거울 중/ 농사 농/ 주인 주/ 옳을 의 ) : 국가의 부의 기초는 농업에 있다는 경제 사상.

중석몰족[ 中 石 沒 鏃 ]

[中:가운데 맞을 중. 石:돌 석. 沒:잠길 몰. 鏃:화살 촉.]

[원말] 석중석몰촉(射中石沒鏃).[유사어]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쏜 화살이 돌에 깊이 박혔다는 뜻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① 전한(前漢)의 이광(李廣)은 영맹한 흉노족의 땅에 인접한 농서[ 西:감숙성(甘肅省)] 지방의 무장 대가(武將大家) 출신으로, 특히 궁술(弓術)과 기마술이 뛰어난 용장이었다. 문제(文帝) 14년(B.C. 166), 이광은 숙관(肅關)을 침범한 흉노를 크게 무찌를 공으로 시종 무관이 되었다. 또 그는 황제를 호위하여 사냥을 나갔다가 혼자서 큰 호랑이를 때려잡아 천하에 용명(勇名)을 떨치기도 했다. 그 후 이광은 숙원이었던 수비 대장으로 전임되자 변경의 성새(城塞)를 전전하면서 흉노를 토벌했는데 그때도 늘 이겨 상승(常勝) 장군으로 통했다. 그래서 흉노는 그를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며 감히 성해를 넘보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황혼 녘에 초원을 지나다가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일발필살(一發必殺)의 신념으로 활을 당겼다. 화살은 명중했다. 그런데 호랑이가 꼼짝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화살이 깊이 박혀 있는 큰 돌이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쏘았으나 화살은 돌에 명중하는 순간 튀어 올랐다. 정신을 한데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한시외전(韓詩外專)》에도 초(楚)나라의 웅거자(熊渠子)란 사람이 역시 호랑이인 줄 알고 쏜 화살이 화살 깃까지 묻힐 정도로 돌에 깊이 박혔다[射石飮羽]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중언부언 (重 言 復 言 )

[ 무거울 중/ 말씀 언/ 다시 부/ 말씀 언 ] :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함.

중원축록(中原逐鹿)

[中:가운데 중. 原:근원 들 벌판 원. 逐:쫓을 축. 鹿:사슴 록.]

중원[天下]의 사슴[帝位]을 쫓는다는 뜻. 곧 ① 제위(帝位)를 다툼. ② 정권을 다툼. ③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함.

한(漢)나라 고조(高祖) 11년(B.C. 196), 조(趙)나라 재상이었던 진희(陳 )가 대(代:산서성)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그 틈에 진희와 내통하고 있던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도읍 장안(長安)에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여후(呂后:고조의 황후)와 재상 소하(蕭何)에게 모살 당하고 말았다. 이윽고 난을 평정하고 돌아온 고조는 여후에게 물었다.

"한신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지 않았소?"

"괴통( 通)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고 하더이다."

괴통은 제(齊)나라의 언변가로서 고조 유방이 항우와 천하를 다투고 있을 때 제왕(齊王)이었던 한신에게 독립을 권했던 사람이다. 그 후 고조 앞에 끌려 나온 괴통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당당히 말했다.

"그때 한신이 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폐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고조는 크게 노했다.

"저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그러자 괴통은 이렇게 항변했다.

"폐하, 신은 전혀 삶겨 죽을 만한 죄를 진 적이 없나이다. 진(秦)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각지에 영웅 호걸들이 일어 났사옵고, 진나라가 사슴[鹿:帝位]을 잃음으로 해서 천하는 모두 이것을 쫓았던[逐] 것이오며, 그중 키 크고 발빠른 걸물(傑物:고조 유방을 가리킴)이 이것을 잡았던 것이옵니다. 그 옛날 대악당인 '도척(盜 )의 개가 요(堯) 임금을 보고 짖었다[ 狗吠堯]'고 해서 요 임금이 악인이라 짖은 것은 아니옵니다. 개란 원래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온데 당시 신은 오직 한신만 알고 폐하를 몰랐기 때문에 짖었던 것이옵니다. 그런데 천하가 평정된 지금 난세에 폐하와 마찬가지로 천하를 노렸다 해서 삶아 죽이려 하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통촉하시옵기를…‥."

빈틈없는 항변에 할 말을 잃은 고조는 괴통을 그냥 놓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도척 : 춘추 시대,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같은 노(魯)나라 사람으로 큰 도둑. 도당 9000여 명과 늘 전국을 휩쓸며 같은 악행(惡行)을 일삼음으로 해서 대악당(大惡黨)의 대명사가 되었다고 함.

중취독성(衆醉獨醒)

[衆:무리 중. 醉:술취할 취. 獨:홀로 독. 醒:술깰 성]

모두 취해 있는데 홀로 깨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고 있지만 혼자 깨끗한 삶을 산다는 뜻

전국시대 말기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은 정치가로서도 뛰어나 懷王(회왕)에게 중용되어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신(重臣)들의 시샘을 사게 되어 자주 모함을 받고 있던 중 회왕의 명령으로 새 법령의 초안을 잡고 있었다. 한창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당시 실력자 중의 한사람인 근상(勤常)이 찾아와 새 법령의 내용을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법령의 중요성에 비추어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 없다면서 굴원은 근상의 요청을 거절했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근상은 굴원을 비방하고 다녔는데 왕도 마침내 굴원을 의심해 멀리하다가 관직을 박탈해 버렸다.

조정에서 쫓겨난 굴원은 머리칼을 풀어 흐트러뜨린 채 장강(長江:양쯔강) 주변을 방황했다. 실의의 나날을 보낸 이때 굴원은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소(離騷)'와 '어부사(漁夫辭)'는 그의 대표작이으로 꼽힌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동안 굴원의 몸은 고목처럼 마르고 얼굴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를 알아본 어부가 있었다.

"아니,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런 곳에까지 왔습니까?"

굴원의 대답은 이랬다.

"온 세상이 혼탁하지만 나만 맑고 깨끗하며 모두가 술에 취해 있지만 나홀로 깨어 있어(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 그들이 나를 쫓아냈다네."

그런 뒤 굴원은 유언을 대신한 시 '회사부(懷沙賦)'를 지은 다음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증삼살인(曾 參 殺 人)

[일찍 증, 석 삼, 죽일 살, 사람 인]

공자의 제자이자 효행으로 이름 높은 증삼이 사람을 죽이다. 곧 터무니 없는 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되풀이하면 믿지 않을 수 없음

매일 세번씩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한다는 三省吾身(삼성오신)은 논어 학이편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하루에 세번씩 나 자신을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서 충실했던가. 친구와 사귀면서 신의가 없지는 않았던가.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가르치지는 않았던가' 여기서 '나'는 증삼이고 증자(曾子)로도 존칭되는 인물이다. 그런 증삼이 사람을 죽이다니.

어느날 증삼과 동명이인(同名異人)인 사람이 살인을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증삼이 살인한 걸로 오해를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증삼의 어머니에게 뛰어와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고 했다. 그러자 증삼의 어머니는 "내 아들은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야"하고는 태연히 배틀에서 계속 배를 짜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또 한 사람이 달려와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습니다"고 해도 아들을 믿는 증삼의 어머니는 여전히 베를 짜는 것이었다. 또 얼마 있다가 어떤 사람이 와서 같은 소식을 전했다. 증삼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놀란 증삼의 어머니는 베틀에서 황급히 내려와 담을 넘어 도망갔다는 것이다.

증삼과 같은 도학군자(道學君子)라 할지라도 또 그것을 굳게 믿는 어머니라 할지라도 세 사람이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닌 거짓말을 퍼뜨려 남을 모해하는 것을 증삼살인이라고 하게 되었다.

지과필개 (知 過 必 改)

(알 지/ 지날 과/ 반드시 필/ 고칠 개) :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지기지우 ( 知 己 之 友 )

[알 지/ 자기 기/ 갈 지/ 벗 우 ] : 자기를 알아주는 벗이란 뜻에서, 서로 뜻이 통하는 친한 벗을 말함.

지난이퇴 (知 難 而 退)

(알 지/ 어려울 난/ 말 이을 이/ 물러날 퇴) :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

지독지애 (舐 犢 之 愛)

(핥을 지/ 송아지 독/ 갈 지/ 사랑 애) :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으며 사랑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에 비유하나 지나쳐 좋지 못함

지독지정 (舐 犢 之 情)

[핥을 지/ 송아지 독/ 갈 지/ 뜻 정}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며 귀여워한다는 뜻으로 자녀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을 비유한 말

지동지서(指 東 指 西)

[ 손가락 지/ 동녘 동/ 손가락 지/ 서녘 서 ] : 동쪽을 가리켰다가 서쪽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데서, 근본에는 손을 못 대고 딴 것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함을 말함.

지란지교 (芝 蘭 之 交)

[지초 지/ 난초 란/ 갈지 지/ 사귈 교] : 芝蘭은 영지와 난초로 모두가 향초를 말한다. 따라서 벗 사이의 고상한 교제를 일컫는다

지란지교의 유래는 공자가 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공자는 "선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향기로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 안에 들어간 것과 같아 오래 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니, 이는 곧 향기와 더불어 동화된 것이고, 선하지 못한 사람과 같이 있으면 절인 생선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나쁜 냄새를 알지 못하나 또한 그 냄새와 더불어 동화된 것이다. 붉은 주사(朱砂)를 지니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옷(漆)을 지니고 있으면 검게되니, 군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있는 자를 삼가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공자의 말처럼 벗을 사귈 때는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롭고 맑은 사귐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벗 사이에 변치 않는 사귐. 두터운 사귐을 일컫는 한자성어를 조금 더 알아보면 관포지교(官鮑之交)막역지우(莫逆之友) 수어지교(水魚之交)등이 있다.

지록위마 (指 鹿 爲 馬 )

[指:가리킬(손가락) 지. 鹿:사슴 록. 爲:할 위. 馬:말 마.]

사슴을 가리켜 말[馬]이라고 한다는 뜻. 곧 ① 윗사람을 농락하여 마음대로 휘두름 ② 위압적으로 남에게 잘못을 밀어붙여 끝까지 속이려 함의 비유.

진(秦)나라 시황제가 죽자 측근 환관인 조고(趙高:?∼B.C. 208)는 거짓 조서(詔書)를 꾸며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를 세워 2세 황제로 삼았다. 현명한 부소보다 용렬한 호해가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오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어쨌든 조고는 이 어리석은 호해를 교묘히 조종하여 경쟁자인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 그밖에 많은 구신(舊臣)들을 죽이고 승상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는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폐하, 말[馬]을 바치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승상은 농담도 잘 하시오. '사슴을 가지고 말이라고 하다니[指鹿爲馬]'…‥. 어떻소? 그대들 눈에도 말로 보이오?"

말을 마치자 호해는 웃으며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한 사람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여 버렸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하는 오히려 혼란에 빠졌다. 각처에서 진나라 타도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 항우와 유방의 군사가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해 오자 조고는 호해를 죽이고 부소의 아들 자영(子孀)을 세워 3세 황제로 삼았다(B.C. 207). 그러나 이번에는 조고 자신이 자영에게 주살 당하고 말았다.

지리멸렬 (支 離 滅 裂)

[가를 지/ 떼놓을 리/ 멸망할 멸/ 찢을 렬] : 통일된 체계가 없고 마구 흩어져 우왕좌왕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됨을 일컬음

지명지년 (知 命 之 年)

[알 지/ 목숨 명/ 알 지/ 해 년] : 명을 알 수 있는 나이. 나이 쉰 살을 달리 일컫는 말.

지상담병(紙 上 談 兵)

[紙:종이 지. 上:윗 상. 談:말씀 담. 兵:군사 병]

책속에서 작전을 논하다. ① 탁상공론. ② 실제적으로는 전연 도움이 되지 않은 이론이나 말을 가리킴

전국시대에 조나라의 장수인 조사(趙奢)는 슬하에 조괄(趙括)이란 아들을 두고 있었다. 조괄은 책 속의 어떤 문제를 제기하면 고금의 책들을 인용하여 그 장단점을 잘도 짚어냈다. 어찌 보면 대장군인 그의 부친보다도 용병술에 대한 탁월한 이론가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를 무척 경하했다. 그러나 대장군 조사만은 자기 아들이 실속이 없이 떠벌리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실제적으로 그의 이론을 용병술에 이용한다면 크게 낭패볼 것이라는 우려였다.

효성왕 7년에 진나라가 조를 침공했다. 대장군 조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인상여는 병이 위독하여 노장 염파가 왕명을 받들어 장평(長平)이라는 곳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진나라에서는 상당 시일이 경과했는데도 염파를 깨트리지 못하자 은밀히 간계를 꾸몄다. 그 내용이 뜻밖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진나라의 장수들은 조괄이라는 장수를 제일 두려워합니다. 염파 정도야 시일이 지나면 함락시킬 것이지만, 조괄이 나선다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 뻔해요."

풍문을 들은 효성왕은 염파를 불러들여 파직시키고 대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했다. 소식을 들은 조괄의 모친이 군왕에게 나아가 상서했다.

"조괄이 병서를 읽어 아는 것은 있으나 병사들을 민활하게 움직이는 데엔 무척 서투릅니다. 그러니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인상여도 같은 상서를 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명을 받은 조괄은 장평에 도착하자 염파의 병권을 이어받았다. 그는 전략을 바꾸어 즉시 진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진나라의 장수 백기(白起)는 거짓으로 패하는 척 달아나다 조괄의 군대를 두 갈래로 분산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도 조괄은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 덕분에 그의 병사들은 전나라 병사들에게 겹겹이 포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결국 무참히 대패하고 말았다. 역사에는 이 전투를 '장평지화(長平之禍)'로 기록하고 있다. 조나라는 이 전투로 인해 국력이 반으로 줄었다. 또한 45만의 군병이 진나라 병사들에게 목숨을 빼았겼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명나라 때에 한림학사 유삼오(劉三五)가 쓴 풍자시에 '조야유과지상병(朝野猶誇紙上兵)'이라 하였다. '조야에서 지상병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지어지앙(池魚之殃)

[池:못 지. 魚:고기 어. 之:갈 지(…의). 殃:재앙 앙].

연못 속 물고기의 재앙. 곧 ① 화(禍)가 엉뚱한 곳에 미침.② 상관없는 일의 재난에 휩쓸려 듦

춘추 시대 송(宋)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사마(司馬:大臣) 벼슬에 있는 환퇴(桓 )라는 사람이 천하에 진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게 되자 보석을 가지고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환퇴의 보석 이야기를 듣고 탐이 난 왕은 어떻게든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은 측근 환관에게 속히 환퇴를 찾아내어 보석을 감춰 둔 장소를 알아보라고 명했다. 환관이 어렵사리 찾아가자 환퇴는 서슴없이 말했다.

"아, 그 보석 말인가? 그건 내가 도망칠 때 궁궐 앞 연못 속에 던져 버렸네."

환관이 그대로 보고하자 왕은 당장 신하에게 그물로 연못 바닥을 훑어보라고 명했다. 그러나 보석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못의 물을 다 쳐낸 다음 바닥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석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연못의 물을 퍼 없애는 바람에 결국 애꿎은 물고기들만 다 말라죽고 말았다.

지 음(知音)

[알 지, 소리 음]

절친한 친구.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春秋時代(춘추시대) 晉(진)의 大夫에 兪伯牙(유백아)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디 楚(초)나라 사람으로 거문고의 達人이었다. 한번은 祖國 楚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오랜만에 고향을 찾았다. 때마침 秋夕 무렵이라 그는 휘영청 밝은 달을 배경으로 구성지게 거문고를 뜯었다. 그때 몰래 그의 연주를 엿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허름한 차림의 젊은 나무꾼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 음악을 꿰뚫고 있었다. 伯牙는 깜짝 놀랐다. 그가 山의 웅장한 모습과 激流(격류)의 우렁찬 기상을 표현하자 나무꾼은 정확하게 맞히었다. 伯牙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당신이야 말로 진정 소리를 아는(知音) 분이군요." 그는 種子期(종자기)라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헤어졌다.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서. 이듬해 伯牙가 種子期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種子期의 묘를 찾은 伯牙는 너무도 슬픈 나머지 최후의 한 곡을 뜯었다. 그리고는 거문고 줄을 끊고 산산조각 냈다. 種子期 같은 知音이 없으니 더 이상 거문고를 연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故事)다. 이때부터 '知音'은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를 뜻하게 되었다.

지초북행(至 楚 北 行)

[至:이를 지. 楚:나라이름 초. 北:북녘 북. 行:다닐 행.]

초나라에 이르려고 하면서 북쪽으로 간다는 말로, 생각과 행동이 상반되는 것 혹은 방향이 틀린 것을 뜻함.

위왕이 혜왕이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려고 할 때의 일이다.

계릉이라는 자는 이 소식을 듣고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왔다. 그의 옷은 불에 그을린 것과 같았고, 머리는 먼지를 뒤집어 쓴 상태였다. 그는 왕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산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태행산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북쪽을 향해 달려가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로 갑니다.' 라고 했습니다. 신이 '당신은 초나라로 간다고 하면서 어찌하여 북쪽 방향으로 갑니까?라고 하자, 나는 많이 가 보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비록 많이 가보았을지라도 초나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나의 말몰이꾼은 뛰어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러가지는 더욱더 뛰어 난 것이지만 초나라로부터는 더욱더 멀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움직여 패왕이 되시려고 하고, 천하의 제후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하며 나라의 크기와 병사의 정예함에 기대 한단을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키고 명성을 떨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왕의 움직임이 많으면 많을수록 왕으로부터 더욱 멀어질 뿐입니다. 초나라에 이르려고 하면서 오히려 북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

[知:알 지. 彼:저 피. 己:몸(자기)기. 百:일백 백. 殆:위태할 태.]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

곧 상대방과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알아보고 승산(勝算)이 있을 때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말.

춘추 시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패업( 業)을 도운 손무(孫武)는 전국 시대에 초(楚)나라의 병법가로서《오자(吳子)》를 쓴 오기(吳起)와 더불어 병법의 시조라 불리는데 그가 쓴《손자(孫子)》〈모공편(謀攻篇)〉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잘 비교 검토한 후 승산이 있을 때 싸운다면 백 번을 싸워도 결코 위태롭지 아니하다[知彼知己 百戰不殆]. 그리고 적의 실정은 모른 채 아군의 실정만 알고 싸운다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다. 또 적의 실정은 물론 아군의 실정까지 모르고 싸운다면 만 번에 한 번도 이길 가망이 없다."

[주] 여기서 말하는 '백(百)'이란 단순한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三)''칠(七)''구(九)''천(千)''만(萬)'등과 같이 '많은 횟수'를 가리키는 것임.

지호지간 (指 呼 之 間 )

[ 손가락 지/ 부를 호//갈 지/ 틈 간 ] : 손짓하여 부를 만한 가까운 거리

직정경행(直 情 徑 行)

[直:곧을 직. 情:뜻 정. 徑:지름길 경. 行:행할(다닐) 행]

감정이 내키는 대로 길을 가다. 곧 상대의 생각이나 주위의 사정 등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함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과 자유(子遊)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부모를 여의고 심히 비탄에 빠져 있는 소년을 보았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은, 그곳을 떠난 다음 방금 본 광경에 관련해 예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먼저 유약이 말했다.

"나는 상례(喪禮)에 곡용(哭踊)의 예(곡을 하고 발버둥질을 하는 예)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지 몰랐으며,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비탄해 하는 모습을 보고, 죽은 사람에 대한 애석의 정은 실로 이 곡용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역시 옛사람이 행한 예에는 각각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자 자유도 말했다.

"그렇다. 그리고 예라는 것은 동시에 정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자가 정에 지나치면 몸을 상하기 때문에 예로써 이를 제한하며, 또 불초한 자는 정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갖춤새로 마련하여, 그로써 정을 생각케 한다. 이것도 예의 효용이다. 감정이 내키는 대로 전후 분별도 없이 행동하여 절제할 줄 모르는(直情徑行) 것은 야만인의 길이며, 군자는 항시 정이 일어나는 것을 이성으로 제어해야만 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盡:다할 진. 人:사람 인. 事:일 사. 待:기다릴 대. 天:하늘 천. 命:목숨 명.]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

‘삼국지’에서 ‘修人待天命’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중국 삼국시대에 위나라조조가 오ㆍ촉 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적벽대전 중에 촉나라의 관우는 제갈량에게 조조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화용도에서 포위된 조조를 죽이지 않고 길을 내주어 달아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은 관우를 참수하려 하였으나 유비의 간청에 따라 관우의 목숨을 살려주었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천문을 보니 어차피 조조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전에 조조에게 은혜를 입었던 관우로 하여금 그 은혜를 갚으라고 보낸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쓴다 할지라도 목숨은 하늘에 뜻에 달렸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려 따를 뿐이다.(修人事待天命)”라고 하였습니다.

진충보국(盡 忠 報 國)

[盡:다할 진. 忠:충성 충. 報:갚을 보. 國:나라 국]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함

기원전 582년, 양(梁)나라의 선제(宣帝)가 죽고, 그 아들 정제(靜帝)가 뒤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제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어린 황제의 후견인을 세우는 일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유방(劉昉) 등 많은 신하들이 수(隋)나라의 양견(楊堅)을 재상으로 맞아들여 어린 황제의 후견인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 당시 수나라는 군소 왕조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양견은 문제(文帝)를 칭하고 있었다.

기왕 기댈 바엔 큰 나무 밑이 안전하다는 것이 유방 등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안지의(顔之儀)등은 그건 나라를 파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이 의견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조정의 은혜를 입어 왔으니, 지금이야말로 진충보국(盡忠報國)해야 할 때다. 타국 사람에게 국운을 맡기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제 죽어서 나라에 보답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결국 양건이 재상으로 맞아들여지고 정제를 보좌하게 되고 급기야는 양을 무너뜨리고 수나라를 세우게 된다.

진퇴양난(進 退 兩 難 )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궁지에 빠짐 진퇴유곡(進退維谷)과 같은 말

진퇴유곡(進退維谷) : 나가고 도망 갈 길이 끊어져 궁지에 몰리다.

질풍경초 (疾 風 勁 草)

[빠를 질, 바람 풍, 굳셀 경, 풀 초]

세찬 바람이 불어봐야 비로소 억센 풀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곤란과 시련을 겪어 봐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가를 알게 된다

前漢(전한)도 2백여년이 되자 어지러워져 마침내 황제의 외척인 王莽(왕망)이 나라를 빼앗아 新(신)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져 괴로움에 시달리다 못한 농민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다. 이때 漢朝(한조)의 일족인 劉秀(유수)도 병사를 일으켰다.

유수의 군대가 오늘날 河南省(하남성)인 潁陽(영양)의 영천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王覇(왕패)라는 사람이 친구들과 함께 유수의 부대에 가담함으로써 유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유수의 1만명 군대가 昆陽(곤양)에서 왕망의 40만 대군과 격돌하여 승리했을 때에도 왕패는 큰 공훈을 세웠다. 유수의 군대가 하북 지방에 출정했을 때 당연히 왕패도 따라 나섰다. 이 원정은 매우 힘든 길이었다. 유수의 군대가 황하를 건널 때 농민군과 맞붙었는데 힘이 달려 苦戰(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때 왕패와 함께 유수편에 가담했던 수십명의 친구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왕패만은 끝까지 남아 유수를 감격하게 했다. 유수는 왕패를 붙들고 말했다.

"영천에서 나를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구나. 오직 그대만이 남아서 힘쓰고 있으니 '세찬 바람이 불어야 억센풀을 알아볼 수 있구려(疾風知勁草·질풍지경초)'."

疾風勁草는 論語(논어)의 명구 '엄동설한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와 같다.

뒷날 후한의 光武帝(광무제)가 된 유수가 왕패를 중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징갱취제(懲羹吹 ? )

[懲:징계할 징. 羹:국 갱. 吹:불 취. :냉채 제.]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채를 후후 불고 먹는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함으로써 모든 일에 지나치게 조심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초(楚) 제(齊) 두 나라뿐이었다. 그래서 진나라 재상 장의(張儀)는 초 제 동맹의 강화론자(强化論者)인 초나라의 삼려 대부[三閭大夫:소(昭) 굴(屈) 경(景) 세 왕족의 족장(族長)] 굴원[屈原:이름은 평(平), B.C. 343?∼277?]을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기회를 노렸다. 이윽고 초나라 회왕(懷王)의 총회(寵姬) 정수(鄭袖)와 영신( 臣) 근상(勤尙) 등이 굴원을 증오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장의는 곧 그들을 매수하여 굴원의 실각 공작을 폈다. 드디어 굴원이 조정으로부터 축출되자 장의는 회왕에게 제나라와 단교하면 진나라의 국토 600리를 할양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했으나 장의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을 안 회왕은 분을 참지 못해 진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대패하고 도리어 접경 지역의 국토까지 빼앗겼다. 회왕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 굴원을 다시 등용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B.C.299) 어느 날 진나라로부터 우호 증진이란 미명 아래 회왕을 초청하는 사신이 왔다. 굴원은 믿을 수 없는 진나라의 초청에 응해서는 안 된다며 극구 방대했다. 그러나 회왕은 왕자 자란(子蘭)의 강권에 따라 진나라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그 이듬해 객사하고 말았다.

초나라에서는 태자가 왕위에 오르고 동생인 자란이 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란에게 책임을 물었으나 이는 도리어 참소(讒訴)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어 또다시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그 후 10년간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굴원은 망명도 하지 않고 한결같이 동정호(洞庭湖) 주변을 방랑하다가 마침내 울분이 복받친 나머지 멱라(汨羅:동정호 남쪽을 흐르는 강)에 몸을 던져 수중 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굴원의 넋을 '멱라의 귀[汨羅之鬼]'이라 일컫고 있다.

《초사(楚辭)》에 실려 있는 굴원의 작품 중 대부분은 이 방랑 시절에 씌어진 것들이다. 그는 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걱정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영신을 미워하며 그의 고고한 심정을 정열적으로 노래했는데 '징갱취제'는《초사》〈9장〉중 '석송(惜誦)'이란 시의 첫 구절이다.

뜨거운 국에 데어서 냉체까지 불고 먹는데 [懲於羹者 而吹 ?兮(징어갱자 이취제혜)]

어찌하여 그 뜻(나약함)을 바꾸지 못하는가 [何不變此志也(하불변차지야)] ‥‥

'석송'은 굴원이 자기 이상으로 주군(主君)을 생각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선비가 없음을 슬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것을 분노하며 더욱이 어쩔 수 없는 고독을 한탄하면서도 그 절조만은 변절하지 않겠다는 강개지심(慷慨之心)을 토로한 시이다.

징비록(懲毖錄)한국사키워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용(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책.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

유성용은 명종21년(1566)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다. 화포 등 무기의 제조, 성곽 건축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했다. 도학ㆍ문장ㆍ글씨로도 이름을 떨쳐,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책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유성용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로 추정된다. 전란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징전비후(懲前毖後)

[징계할 징, 앞 전, 삼갈 비, 뒤 후]

지난날을 징계하고 앞날을 삼가다. 이전에 저지른 과오(過誤)에서 교훈을 얻어 뒷날에는 일을 신중하게 한다는 뜻

周(주)나라 武王(무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 成王(성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성왕은 아직 나이가 어려 그의 숙부 周公(주공)이 攝政(섭정)을 하게 되었다. 주공은 무왕이 殷(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러자 무왕의 사촌형인 管叔(관숙)과 蔡叔(채숙)은 주공을 시기한 나머지 주공이 성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기 위해 역적 모의를 하고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紂王(주왕)의 아들 武庚(무경)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성왕을 몰아내려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왕은 시 한 수를 지어 이 반란을 기어코 평정하겠다는 뜻을 다졌다.

이 시가 바로 '시경'에 수록된 '周頌(주송)'중 '小毖篇(소비편)'으로 그 첫구절이 '予其懲而毖後患(여기징이비후환)'으로 되어 있다. 지난날의 과오를 뼈아프게 새기면서 앞으로 다시는 다른 환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계한다는 뜻.

'지난날의 과오'란 한때 성왕이 간신들의 모함하는 말을 믿고 주공을 멀리했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懲前毖後(징전비후)는 이 시 구절을 따서 후세 사람이 만든 것.

반란은 주공의 노력으로 진압되고 무경과 관숙은 처형당하고 채숙은 멀리 유배(流配)의 길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西厓(서애) 柳成龍(유성룡)이 전쟁을 회고하면서 쓴 '懲毖錄(징비록)'은 바로 懲前毖後에서 따서 붙인 제목. 왜란을 교훈으로 삼아 스스로 힘써 다시는 그런 前轍(전철)을 밟지 말자는 뜻이다.


'고사성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 타  (0) 2019.05.31
  (0) 2019.05.31
  (0) 2019.05.31
  (0) 2019.05.31
  (0) 2019.05.31